작성일 : 2015-04-17 03:39
2013년 8월 연수를 다녀와서(송추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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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태희
조회 : 4,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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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회 연수는 겨우 두 번째 참여하는 거지만, 실은 올 때마다 나는 신경질이 난다.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결핍인 줄도 모르면서 자란 내 학창시절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어째서 여기 모여 있는 선생님, 아니 그 비슷한 선생님 한 분 만나지를 못했을까?
5학년 때 나는 사남초등학교에서 승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사남에서 다 만들고 온 주머니 만들기를 여기에선 한창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세히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나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자투리 천과 바느질 도구들을 챙겨 왔다. 지난번에 크게(원래 교과서에 나와 있는 크기)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필요한 작은 주머니를 만들자 싶어 몇 시간에 걸쳐 바느질을 해 나갔고, 거의 마무리가 되는 시점이었다. 김○○ 선생님은 그제야 내가 만든 주머니를 보더니 “어디서 이런 주머니를 만들고 있어? 누가 이렇게 작게 만들래?” 하며 내 자리 곁에서 불같이 화를 내었다. 5학년에 새로 만난 김○○ 선생님은 갓 끓인 라면발 같은 생생한 파마머리를 하고 분칠한 깨끗한 피부에 입언저리에 표가 많이 나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 차림새가 매우 세련되었고 이쁘다고도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독설을 퍼붓고 있는 선생님을 앉아서 치올려보고 있자니, 가깝지도 않았던 선생님과 나 사이가 저만치 물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한참을 나무란 뒤에 “건방진 것 같으니.” 하고 내뱉으며 내 자리를 떠나갔다. 그 뒤로 나는 ‘건방지다’는 말이, 누가 누구한테 ‘건방지다’고 말할 때 전하고자 하는 보통의 불편한 기운(건방지다는 말을 할 때라면 결코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으니까)을 훨씬 웃도는 비난으로 느껴졌다.
6학년 때 만난 박○○ 선생님은 결혼을 하지 않은 중년 여인이었는데, 이를 앙다물고 있으면 그렇게 야무져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 반 노래도 함께 만들고, 우리가 쓴 글과 그림으로 문집도 만들어 줬다. 그때는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나마도 참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을 알겠다. 어쨌든 그 당시에 나는 선생님이 한 노력에 비해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헤아릴 만한 주변머리는 없는 어린 아이었다.
2학기 때였던가 생리를 시작했는데, 내 생애 처음 겪은 생리통이 심각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파 정신이 혼미해지고, 그래서 지금 내가 어디가 아픈 건지도 모르겠고, 물을 한 모금이라도 집어넣었다간 그대로 토해 버리고. 한마디로 난리부르스를 췄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내가 토한 뒤치다꺼리를 해 주면서 “애들 밥 먹는데 좀 있다 토하지.” 하는 것이다. 반 노래며 문집이며 만들어 주고, 그나마 내가 토한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 선생님한테 그때 나는 그저 미안하고 송구하고 잘못했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 다 커서 어느 날, 박○○ 선생님은 나한테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다는 생각이 광선처럼 떠올랐다. 생리통 때문에 길바닥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난 동네 병원에서도 아니고, 애 낳다가 겪은 진통이 그동안 내가 겪은 생리통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산부인과 침대 위에서도 아니었다. 그냥 길을 걷다가 무심결에, 말 그대로 ‘광선’처럼, 아파서 토하는 아이한테 선생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2학년 때 오줌을 쌌을 때, 나는 내가 오줌을 싸고 창피를 당한 기억만 남아 있고, 왜 오줌을 쌀 때까지 화장실을 가겠다고 말을 하지 못했는지 그 까닭은 기억하지 못한다.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차를 마실 컵을 씻어 오라고 했는데, 올라오다가 자빠져서 그만 컵들 절반을 다 깨 먹었다. 선생님들이 모여 앉은 그 사이로 다가가서 컵을 깼노라고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선생님한테 말 못하겠는 것이 많았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는 학교생활이라는 것들이 무척 짧고 대수롭지 않은 일들 투성이지만, 다 커서 떠올려보면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좀 더 총명한 아이였다면, 그런 일을 겪었을 그때에 그것이 부조리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런 일 자체를 겪지 않아도 될 만큼 이쁨을 받았을까? 이 모든 일이 나 한 사람의 잘못이었을까? 나는 어떤 선생님을 만나야 했을까?
글쓰기회 연수를 시작하고 처음에는 퍽 씁쓸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기 있는 선생님들 말씀을 듣고 있자니, 그동안 내 몸에는 저장돼 있었지만, 굳이 떠올려 본 적 없었던 어린 시절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런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했을까? 심지어, 21세기에 학교를 다니는 내 딸아이도 이런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 선생님들이 아이들 곁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고 짙은 감동이 올라왔다. 이런 뜨거운 진심들이, 내가 느끼는 절망감을 거두고 다시금 이 며칠 안 되는 소중한 연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다. 이무완 선생님이 사례 발표 마지막에 쓴 말을 다시 한 번 읊어 본다.
(앞 줄임) 내가 한 일이라곤 언제나 놀 마음으로 엉덩이 들썩들썩하는 아이들 불러 앉히고는 쓸 종이만 나눠 줬을 뿐이지요. 가끔 가다 귓등으로 듣고 흘릴 부스러기 말로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말로 지껄인 만큼 단단해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보잘것없는 일상이 쌓여 저마다 작은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니 글쓰기 지도랄 것도 없습니다.
선생이라는 자리는 실은 빈 종이를 나누어 주고, 맘껏 보게 하고, 맘껏 지껄이게 만드는 자리. 나는 이미 무언가로 꽉 채워져서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선생님들을 만나왔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나한테 조건이 되고 한계가 되고, 숙제가 되었다. 나는 죽은 생명체가 아니었으므로 조건은 활용하고, 한계는 뛰어넘을 궁리를 하고, 잘했든 못했든 숙제를 풀지 않고서는 다음 인생으로 건너뛰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선생도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번 글쓰기회 연수에서도 여지없이 어떤 안도감을 느끼며 돌아왔다. 여기에, 참을 수 없는 아이를 가만히 안아 주는 선생님, 욕을 하면 잘 썼다고 칭찬해 주는 선생님, 이야기가 하고 싶어 못 견디게 만드는 선생님, 해도 해도 모자란 것 같아 늘 뒤를 돌아보는 선생님들이 있다. 내가, 내 딸아이가 교실에서 만날 수는 없어도, 분명히 어딘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다. 그러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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