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4-17 03:28
2011년 1월 연수를 다녀와서(구자행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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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태희
조회 : 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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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한 회원은 적었지만 따뜻한 정이 흐르는 오붓한 연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중식 선생님, 이호철 선생님, 서정오 선생님이 함께 해서 참 좋았습니다.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호철 선생님 주제발표 때 하신 말씀 가운데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본을 받아 바르게 자라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어른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의식을 길러 주어야 하겠다.” 이 말이 오래 남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으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자세하게 쓰기’에 대해 조금 말해 보겠습니다. ‘자세하게 쓰기’는 글을 쓸 때 꼭 지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세하게 쓰려면 먼저 자세하게 보아야 합니다. 자세하게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대상에 마음이 다가가서 사랑의 마음이 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세하게 쓰는 문제를 가지고 그동안 논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세하게 쓸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만 자세하게 쓰도록 지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반성이 있었지요. 그렇지만 저는 또 다른 쪽에서 자세하게 쓰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과 시 쓰기를 하다 보면, 아이가 쓴 시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싱겁고 밋밋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아이에게 이건 시가 안 되겠다고 다른 글감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절실한 마음이 없는데 자세하게만 쓴다고 좋은 글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세하게 쓰기는 방법이지요. 방법 이전에 진정으로 쓰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절실한 마음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절실한 마음을 담아 썼는데도 뭔가 모라란다 싶을 때, ‘이 부분을 자세하게 다시 써 보자.’ ‘그 순간 마음이 또렷하게 드러나도록 자세하게 그려보자.’ 하고 지도합니다. 방법보다는 내용이 먼저지요. 이 비슷한 고민을 오래 전에 속초 탁동철 선생님이 회보에 발표한 적이 있지요. 지난 회보에서 정유철 선생님이 ‘자세하게 쓰지 말자.’고 용감하게 했던 말도, 그 바탕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고 봅니다. 글을 쓰려는 진정한 마음이 없는데 자세하게 쓰라고만 강조하면 길기만 하고 감동이 없는 너절한 글이 되기 싶습니다.
박선미 선생님 사례 발표를 들으면서, 선생님의 이야기가 무슨 법문처럼 와 닿았습니다. 그렇지요. 한 시간 수업을 망친 게 교사 자신인데, 자기 잘못을 모른 채 아이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깁니다. 아이가 떠든다고 버럭 소리 지르고는 그만 화를 삭이지 못해 수업을 망쳐 놓고서는 떠든 아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야 늘 떠들지요.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면 아이가 아니지요. 아이는 그대로인데 아이들이 변했다고, 예전 같지 않다고, 해를 거듭할수록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문제라고 합니다. 사실은 교사의 마음이 식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하는 것이지요. 기다려주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어서 수업을 망친 것이지요. 다만, 아이들이 학교 공부와 학원 공부에 지칠 대로 지쳐서 날이 서 있을 뿐입니다. 날이 선 마음을 품어주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박선미 선생님의 성찰이 마치 법문 같았다는 말입니다.
김순용 선생님이 ‘이랑학교’ 아이들과 글 쓰는 이야기도 참 감동이었습니다. 글 하나로 한 아이를 온통 이해하게 되더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글쓰기는 참 좋은 공부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습니다. 교사와 아이, 또 아이들끼리 서로 막혔던 마음이 트이고, 서로 마음을 나누게 해 주는 통로가 바로 글쓰기구나 싶었습니다.
서정오 선생님 강의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고, 잘 짜여진 작품 한 편 같았습니다. 우리가 글보다는 말을 할 때, 절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넘쳐서 욕심을 버리기가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말이 많다 보면 아이들 말을 들어주지 못한다고 봅니다. 선생님 강의가 오롯이 우리에게 좋은 말하기 공부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공공기관 선진화’ ‘녹색성장’ ‘경영효율화’ ‘구조조정’ ‘규제완화’ ‘노동유연성’ ‘강 살리기’ ‘미디어 육성법’ 이런 말들이 사람들의 귀와 눈을 속이고, 억압하려는 술수라는 말씀, 그래서 우리 말 운동이 사람을 해방하는 운동이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모둠 토론 때 느꼈던 것입니다. 교육부에서 연수 준비하면서 자료집을 만듭니다. 글 독촉을 하고 자료집을 엮으면서, 어떻게든 연수 전에 하루라도 앞당겨 자료집이 회원들 집에 닿도록 애를 씁니다. 자료집을 읽고 연수에 오라는 뜻이지요. 그래야 연수가 알차게 되니까요. 연수를 하면서 자기 글을 숙제로 내는 곳은 우리 글쓰기회뿐입니다. 글을 써 내는 것도 꼭 해야 하는 연수 숙제지만, 자료집을 읽고 오는 것도 꼭 해야 하는 숙제입니다. 이번 연수에 숙제글을 낸 사람도 적었고, 또 우리 모둠 사람 대부분 자료집을 읽지 않고 왔습니다. 그래서 글 합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자기가 쓴 글이 있어야 글 합평에 마음이 쏠립니다. 글도 쓰지도 않았고, 남이 쓴 글도 읽지 않았으니 깊이 있는 글공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이 저는 이번 연수에서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연수 자료집에 실린 글 가운데 꼭 이야기하고 싶은 글이 세 편입니다. 문종길 선생님 글과 최관의 선생님 글과 이영근 선생님 글입니다. 먼저 문종길 선생님이 쓰신 ‘학생상담집단 진행 기록’을 읽고는 알맹이가 빠진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별 상담을 했건 집단 상담을 했건 아이와 상담을 했다면, 상담 절차를 쓸 것이 아니라 상담한 아이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 모습은 없고 과정만 나열해 놓았습니다. 상담한 것을 짧게 기록해 놓은 글 말고, 아이와 이야기 나눈 것을 하나 붙잡아 생생하게 풀어 써 주셨으면 우리에게도 좋은 공부가 되지 않았을까 아쉬웠습니다.
최관의 선생님 글은 서울시교육지원청에서 하는 사교육 추방 토론회에 초등 대표로 발표한 논문이었습니다. 최 선생님도 그러셨지요. 글을 고쳐 보려고 했으나 안 고쳐지더라고. 글이란 게 참 어렵구나 하고 느꼈다고. 학교에서 무수히 많은 무슨 연구학교 보고서 같은 글이 모두 이렇습니다. 저는 이런 글이, 어려운 한자말 몇 개를 고친다고 달라질 거라 보지 않습니다. 최관의 선생님 글은 입말이 아니라 글말투입니다. 나날이 입으로 주고받으며 사는 말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못 들어선 것이지요. 책을 이렇게 써서 서점에 내 놓으면 아무도 사보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이런 글은 읽히지 않습니다. 죽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학교 보고서에만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보고서가 하나도 읽히지 않고 그대로 묻힙니다. 해마다 엄청난 교육 예산을 낭비하는 셈이지요. 우리 모둠에서도 어떤 분이 이 글이 술술 안 읽혀지더라고 했습니다.
최관의 선생님이 우리 회보에 이어 쓰는 어린 시절 이야기는 살아 있는 입말 그대로입니다. 이야기도 가슴을 울리지만, 말투가 시원시원해서 저절로 와 닿지요. 흔히 학자들은 논문에 쓰는 말이 따로 있고, 보고서에 쓰는 말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은 논리를 세워 주장을 펼쳐야 하고, 보고서는 내용을 자세하게 전달해야 하지만, 말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 말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청에서 하는 토론회라 기존의 틀을 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회보에 실을 때는 쉬운 우리 말로 다시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영근 선생님 글은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6학년인 자기 반이 음악발표회를 한다고 4학년 교실에 가서 실로폰을 열다섯 개 빌렸습니다. 음악발표회를 마치고 돌려주었는데, 그 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실로폰 채가 열 개나 없고 실로폰 하나는 망가졌다고.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아이들과 이 문제를 의논했지요. 아이들은 실로폰 쓴 사람이 물어 주자고도 하고,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뾰족한 답을 못 찾습니다. 그런 가운데, 마침 학교 자료실에서 빌려 썼다가 다시 갖다 놓으려는 3학년 선생님을 만나, 거기서 채 열 개와 실로폰 하나를 가져다가 4학년 교실에 갖다 주었지요. 이 일을 아이들에게는 숨기고 너희들이 이 문제를 의논해서 해결해 보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이렇게 해결합니다. 우리는 6학년이라 이제 실로폰 쓸 일이 없으니 우리 것으로 물어주는 것이 좋겠다.
이 글을 가지고 합평한 모둠에서는 이영근 선생님이 아이들의 잘못을 윽박지르지 않고, 기다려 주면서 스스로 해결하게 한 점이 훌륭했다고만 하였습니다.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이 글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이, 빌려 쓴 물건을 되돌려 줄 때, 물건이 온전한지 또 개수가 제대로 맞는지 확인하지 않은 점을 반성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쓰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되돌려 준 잘못에 대한 인식이 글만 보면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빌려 쓴 실로폰에 문제가 생겼다네, 정도로 의논을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는, 망가진 실로폰과 모자란 채를 학교 자료실 물건으로 채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제는 실로폰 쓸 일이 없으니 우리 것으로 물어 주자고 한 것을 두고, 문제를 스스로 잘 해결했다고 칭찬할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쓸모가 없으니’ 하는 마음은 요령을 찾은 것이지, 따뜻한 나눔의 마음이라 보기 어려웠습니다. 4학년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 답이 아니라, 어떻게든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궁여지책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4학년 교실에 가서 기타동아리가 공연을 해 줄 때도, 미안해서 사과하러 간 것이 아니라 고맙다고 기타 공연을 해 주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영근 선생님 글이, 성찰하는 글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는 글로 읽혔습니다.
이 글은 연수 소감 쓰는 시간에 쓰다가 다 못 써서 집에 와서 마무리했습니다. 지난번에 최관의 선생님 주제발표를 듣고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는 오랫동안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 뒤에 정유철 선생님이 이정호 선생님이 쓰신 ‘면담 글쓰기’를 비판하는 글을 회보에 실었고, 강우성 선생님이 그 다음 회보에 반론을 썼습니다. 건강한 비판은 좋은 공부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또 비판 글을 써 봅니다. 혹시 제가 글을 잘못 본 곳이 있다면 누구라도 지적해 주시면 좋은 공부로 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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