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등지도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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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4-05-26 14:08
    고등학생 글쓰기 지도 3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5,022  
    마음을 잇는 모둠일기

    이상석


    ▣ 마음을 잇는 모둠일기

    우리 2학년 2반은 5월 8일부터 모둠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4월부터 모둠일기를 써 보는 게 어떠냐고 운을 띄웠으니, 모두가 찬성하는 데 한 달이 걸린 셈이다. 처음에는 반 수 가량 반대하더니 다섯 명, 세 명으로 줄다가 나중에는 한 명이 끝가지 반대를 한다.
    "그럼 우선 쓰고 싶은 사람만 쓰자."고 했더니 "쓸려면 다 써야 하는데 나는 아직 쓰기 싫다."고 우긴다. 중학교 때 써 보았는데 재미도 없고, 엉뚱한 것 썼다고 꾸중만 들었단다. 솔직하게 쓰지도 못할 일기를 왜 쓰느냐고 한다. 
    "야, 병만아! 내가 이래 뵈도 모둠일기의 원조다. 원조! 너거 쓴 글 내용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사람으로 보이나. 고마 찬성 좀 해도."
    병만이는 아이들의 장난스런 원성을 듣고서야 "좋다. 써 준다."고 뜻을 모아 주었다. 이렇게 뜸을 들이고 뜻을 모으는 것이 모둠일기를 재미나고 뜻있게 이끄는 거름이 된다.
    글쓰기에 대한 간단한 얘기만 하고 바로 쓰기를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다. 글 하나 하나에 도움말도 주고 [글 고치기]도 해 보아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가. 좋은 글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의 삶을 아는 데는 무척 도움이 된다. 여학생 이야기, 학원 이야기, 자습 안 하고 야구 보러 간 이야기, 술 마신 이야기……. 내가 모르던 아이들 모습을 볼 때마다 오히려 살가운 정이 생긴다.
    5월 18일에야 아! 글 하나 나왔구나, 눈을 번쩍 뜨고 읽고 또 읽은 글이 이것이다.

    1995년 5월 18일 날씨 맑음. 
    오늘 일영이가 학교를 오지 않았다. 상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어제 쉬는 시간이었다. 일영인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상고면 며칠 노는데?" 난 상업고등학교면 며칠 노느냐로 해석했다. 그래서 "상고가 왜 놀아?"라고 되물었다. 그러니 일영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는다. 알고 보니 일영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다니다니' 
    그리고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던 날 생각이 났다.
    작년 평일 아침이었다. 한참 잘 자고 있는데 이모가 갑자기 문을 열며 들어와 "너거 할매 돌아가셨다."며 나를 깨웠다. 난 순간적으로 '드디어 돌아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닌 요즘 며칠 들어 밥도 못드시고 시름시름 앓으며 누워만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난 한번 더 물었다. 이모에게 내가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모는 똑같이 대답했고 난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송이를 깨웠다. 송이도 역시 놀라워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송이도 그리 놀라지는 않은 것 같다. 할머니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모는, 아버지와 엄마는 벌써 큰집에 갔다고 그랬다. 송이와 난 서둘러 큰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면서 생각해 보니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송이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 눈물 안 나올 것 같다. 어짜노." 
    하지만 이건 필요없는 걱정이었다. 큰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할머니 영정이 보였다. 그때까지도 슬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앞에 퍼져 앉아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한방울씩 흘리고 있는 지원이형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병풍 뒤로 들어가 콧구멍 귓구멍을 솜으로 막은 할머니 얼굴을 쓰다듬으며 "엄마, 엄마……." 외치며 통곡을 하는 고모와 눈을 감고 고모를 뒤에서 감싸고 말리고 있는 큰아버지, 담배만 연신 피우며 한숨만 내쉬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억한 감정이 솟아올라왔다.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나오지 않을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송이는 벌써 훌쩍거리고 있었다. 난 밖으로 나왔다. 그 광경을 더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웠다. 눈물이 계속 흘러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소명이형과 복희누나가 심부름을 하고 다녀오는지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난 고개를 돌렸다. 형과 누나도 모른 척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난 눈물이 멈추기를 기다렸지만 멈추어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추억이 떠올랐다. 옛날 내가 5살 땐 창원 근처 시골에서 살았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거기서 우리 가족과 할머니가 같이 살았다. 그곳은 우리 가족과 할머니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곳을 떠나 할머닌 큰집으로 가고 우린 딴 곳으로 이사를 갔다. 할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할머닌 내 손을 잡으며 
    "정수 대학 가서 결혼하는 거 보고 죽으야 할낀데."
    "내 아들 낳는 건 안 볼끼가"
    "그때까지 내가 살것나."
    "살지 와 못 사노."
    "오냐. 살마."
    하고 웃으시며 말하곤 했다.
    그 모습이 계속 떠올라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이틀 뒤 할머니를 태운 장의차를 타고 마산으로 할머니 산소를 향해 떠났다. 난 창문가에 앉았고 아버진 내 옆에 앉았다. 뒤에 할머니 관 쪽에선 큰고모와 작은고모가 계속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 밖을 보니 차는 부산을 벗어나 마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 아버진 계속 담배만 피워댔고 난 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생긴 무지개를 보며 할머닌 꼭 극락으로 가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옛날에 살던 그 조그마하고 아름답던 마을이 나타났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주체할 수 없었다. 아버진 내 어깨를 꼭 쥐고 계셨고 뒤에선 계속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산에 도착하자 할머니를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넣었다. 울음을 그쳤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곡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왜 눈물이 나지 않았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저 착잡한 마음뿐이었다. 흙을 내 손으로 퍼서 그 위에 뿌린 뒤 발로 눌렀다. 가슴이 아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도, 생전 눈물이 없을 것 같던 큰아버지도 모두 울고 있었다. 난 무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물을 짜내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를 묻고 다시 장의차를 탔다. 부산으로 가는 도중 다시 그 마을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은 울지 않고 넋 빠진 듯 창 밖을 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난 눈물이 나왔다. 왜인진 모르겠다. 그저, 그래 그냥 '그저'다.
    일영이도 아마 나와 똑같은 과정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커다란 아픔을 가슴 속에 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비워진 자리를 느낄 때마다 아파하게 될 것이다. 빨리 그 상처가 아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한정수)

    다음 날 일기에는 이 글을 읽은 아이들 반응도 나왔다.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읽어 주신 정수의 글, 그냥 눈물이 났다. 나도 할머니가 한 분 계신다. 겁이 난다. 할머니의 죽음. 생각해 보지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래서 울었다.] (5.19 한기석)
    [어제 8교시 때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께서 정수 모둠 일기장을 찾아서 읽어 주셨다.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뜨끔했다. 사실 그랬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래 전부터 몸이 안 좋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초량에 있는 성분도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도 같이. 할머니께서는 갑자기 '풍'이 왔다고 해서 입원을 하셨다. 나는 14일 일요일날 병원에 문병을 갔다. 할머니께서는 병실에 계셨다. 고모할머니께서도 와 계셨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아버지가 따라 오라고 해서 따라갔다. 계단을올라가서 보니 중환자실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 계신다. 면회시간이 되었다. 가운을 입고 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계셨다. 가서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할아버지의 얼굴도 살펴보았다. 눈도 뜨시지 못하고 호흡만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너무나 불쌍하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보는 게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니까 열심히 주물러 드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호흡기만 빼면 며칠이 안 지나서 돌아가실 거라고 했다. 그래서 요즈음은 이 일로 아버지도 피곤하시고 집안 모두가 아니 친척 모두가 그렇다. (가운데 줄임)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병원에 있을 때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숨을 가쁘게 쉬시던 그 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정말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텐데…….] (5.20. 정일영)

    정수의 글을 가지고 좋은 글은 어떤 것인가 얘기도 했다.
    글의 생명은 '감흥'이다. 감흥이란? 
    "아! 나도 그랬어. 내 맘하고 똑같아. 그런데 왜 나는 진작 이런 글을 못 썼지……."
    "어? 넌 그랬어? 난 이랬는데……. 그래도 너의 마음은 알겠어."
    "맞아! 이 글을 읽으니 이제 알겠어."
    "뭔지 모르지만 마음에 찡하게 울려 오는 게 있어."
    "좋네! 어쩜 이렇게 솔직하게 썼을까. 난 왜 이런 얘길 못 털어놓지……."
    이런 것이다.
    글쓴이의 생각·느낌·행동, 그 글에 나타난 상황·배경이 눈에 보이듯이 생생해야 한다.
    목숨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쓴 것. 여기서 목숨은 사람 목숨뿐 아니라 곤충이나 식물의 목숨까지도 생각해야 한다.
    자기 삶을 당당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글은 좋게 마련이다. 자기 삶을 반성하는 것은 좋으나 비겁한 생각이나 행동, 스스로를 천하고 낮게만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사회 정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글.
    평소에 하는 말대로 쉽고 바르게 쓴 글.

    그리고 정수의 글을 자세하게 살펴 보았다.
    1. 얘기를 푸는 방식이 퍽 자연스럽다. 일영이의 얘기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했고, 끝에는 일영이의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바라는 마음까지가 물 흐르듯하다.
    2. 이야기의 중심을 잘 잡고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다니'던 일영이를 보면서 자기도 눈물이 안 나면 어쩔까 걱정했던 일과 실제 있었던 눈물과 관계된 일들을 놓치지 않고 끌어가고 있다.
    3. 줄친 ①들을 보면 자기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어 참 좋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드러낼 때 감흥을 일으킨다. 사람 마음은 모두 비슷하기 마련이니까.
    4. 줄 친 ②는 행동만을 그리듯이 썼는데도 상황과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상을 당한 집안에서 아이들은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싶어도 못한다. 어색하게 눈을 마주쳤다가 돌려 버리는 모습이 훤히 보인다.
    이 부분 말고도 이 글에는 감정을 나타내는 낱말--<슬펐다, 안타까왔다 따위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냥 그때 상황이나 행동만 묘사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글쓴이의 감정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상황을 드러내 보이기만 해도 읽는 이는 글쓴이의 감정을 잘 알 수 있다. 글은 이렇게 써야 감정을 더 절실하게 드러낼 수 있다.
    5. 줄 친 ③은 본래 
    ["정수 대학 가서 결혼하는 거 보고 죽어야 할낀데."라고 말씀하시곤 하셨고, 그러면 나는 "내 아들 낳는 건 안 볼끼가." 하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할머닌 "그때까지 내가 살것나."라고 말씀하셨고, 난 또 "살지 와 못 사노."라고 말하면 할머닌 또 "오냐, 살마." 하고 웃으시며 말하고 했다.]고 썼던 것을 <~라고 했다>는 따위를 빼버렸다. 이러니 훨씬 낫지 않나? 따옴표 뒤에 <~라고 했다>는 말은 안 써도 된다. 정수 글에 이런 부분이 딴 데도 많은데 주의할 일이다.
    6. 마지막 부분, 일영이가 지금은 비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있지만, 막상 집에 가면 가슴 아파할 것이란 걸 정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위로를 한다. 나는 여기에서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 수학여행 때 있었던 일 한 가지만 쓰기

    6월5일부터 8일까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기행문을 써 낸 걸 보니 한결같이 여정만을 죽 늘어놓았다. 느낌과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행 전체를 쓰려고 하지 말고 여행 중에 있었던 일 가운데 인상 깊은 일 한 가지만 골라서 자세히 써 보라고 했다.
    기행문은 감상·서사·묘사·보고문이 뒤섞여 나타날 수 있는 글인데, 정해진 분량에 여행 전체를 나타내려면 결국 여정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겠다. 전체 여정은 간단하게 쓰고, 꼭지를 나누어 쓰고 싶은 부분을 주제별로 쓰면 좋겠다.

    성류굴
    2-12 장용훈
    버스로 6시간 정도를 달려 점심 때쯤 첫 목적지인 성류굴에 도착했다. 더운 날씨에 버스에서 오랫동안 시달려서인지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았지만 단체생활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수학여행비로 낸 돈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굴로 향하게 되었다. 끝 반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 반이 앞장서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난 세번째여서 전교생 중에서 세번째로 들어가게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앞장선 기수를 따라 조금 걸어가니 동굴 입구가 보였다. 만화라든지 영화에서 보면 동굴 입구가 커다란 아치형으로 웅장하게 생겼던데 성류굴 입구는 꼭 바위를 손가락으로 푹 찔러 콧구멍을 내어 놓은 것 같이 조그만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몸을 푹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상체는 숙이고 엉덩이는 치켜든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갔다. 돌들을 만져 보니 미끈미끈한 게, 그렇지 않아도 콧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으로 들어왔는데, 정말 실감났다. 조그만 입구를 지나 어느 정도 넓은 곳으로 나왔을 때 '유령의 집' 같은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뾰족한 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있고 조명도 그렇게 밝지 않은 게 동굴 부분 부분마다 컴컴한 그림자가 생겨 있어서였다. 그러나 으스스하다기보다는 포근한 분위기였다. 동굴을 따라 철판으로 된 길이 놓여져 있었다. 그 길대로만 가면 동굴을 한 바퀴 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가며 동굴 내부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뒤에서 아이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대충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름이 붙여진 돌들은 나름대로 유심히 살펴봤지만 전혀 이름과 연관되는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하마처럼 생겼다는 것도 그냥 뭉텅한 바위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무슨 관음상이란 것도 그냥 길쭉하게 솟아 있는 돌 같았다. 또 무슨 무슨 탑이라 하는 것도 내 눈에는 모두 아이스크림 같았다. 빛깔도 누르스름한 게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쌓아놓은 게 좀 녹아내린 모양이었다. 나는 모양보다 크기에 놀랐다. 1년에 겨우 0.4mm씩 자란다는데 몇년 동안 커야지 저런 크기가 될까? 길이가 내 키의 서너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이런저런 것을 보며 반환점을 돈 후 얼마 안 가니 웅덩이가 보였다. 완전히 별실처럼 되어 있었는데 어두컴컴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별로 넓지는 않았다. 물 속에는 내 팔뚝 만한 비단 잉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만약 누가 인위적으로 풀어 놓은 게 아니라면 천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수심이 쓰여진 팻말을 봤을 때 엄청 놀랬다. 수심이 30m라고 했다. 별로 깊지 않게 보였는데, 이 물 속에 10층짜리 건물이 들어갈 수 있다니……. 얼마 동안 계속 물 속을 바라보다, 늦을까봐 그냥 나왔다. 나오면서도 물 속은 어떻게 생겼는지, 잠수해서 내려가 보면 어떨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정말로 그렇게 깊은지 정말 궁금하였다.


    2-12 손영호
    "빨리 따라라, 술 안 따르고 뭐하노?" 나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술을 재촉하였다. 우리들은 소주 반 잔에 맥주, 콜라 들을 섞어 여러 잔을 마셨다. 내 딴에는 흥을 좀더 돋우기 위해 술을 재촉했지만 술 몇 잔 마시니 숨이 가빠지고 조금씩 어지러웠다. 술을 다 마신 뒤 난 너무 어지러워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올라올 것 같아 좀 아쉬웠지만 그대로 그냥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요란한 음악 소리에 잠을 깨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멀쩡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머리도 아프고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올릴 것 같아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두어 번 올렸는데 그리 썩 시원하지 않아 웅조를 불러 등 좀 두들겨 달라고 했다. "아이고, 나 죽네." "뭐 그것 조금 마시고 그라노." "몰라, 왜 내만 이렇노." 등을 두드려도 별로 시원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씁기는 왜 그렇게도 쓰운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빨리 식사하러 오라는 방송이 나오자 다른 애들은 다 나가고 혼자 화장실에 남았다. 올릴 것 같아 화장실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술 안 마시는 건데. 이제 술 먹나 봐라." 이렇게 혼자말만 지껄이고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리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다른 친구들이 식사를 하고 온 뒤에도 난 화장실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 설악산이고 뭐고 오늘 하루를 화장실에서 보내게 될 것만 같았다. 
    얼마 안 있어 집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어서 난 다시 혼자 화장실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반장이 올라와서 전부 나가야 한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밖에 있는 애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애들이 몇몇 있었다. 
    난 선생님께 몸이 안 좋아서 여관에 남으면 안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요놈 요거, 얌전하던게 술은 왜 마셨노." 하시며 머리를 콕 쥐어박으셨다. 술 마셔서 아픈 것은 운동 좀 하면 나아진다면서 남지 못하게 하셨다.
    하는 수 없이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설악산에 오르게 되었다. 오만 인상을 찌프리고 지나던 내 모습을 김종식 선생님께서 보시고는 눈치를 채셨는지 고소한 듯이 해해 웃으셨다. '남은 아파죽겠구만 와 웃노.' 속으로는 좀 선생님이 얄미웠다. 시간이 좀 지나자 곧 죽을 것만 같았던 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찡그려졌던 인상도 조금씩 웃음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설악산을 내려올 때쯤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수학여행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글쓰기> 5호 (199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