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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4-04-24 14:11
    글쓰기 교육의 역사 1 (이오덕)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8,857  
    글쓰기 교육의 역사  1

    어린이 글쓰기 역사 ①

                                       이오덕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삶과 마음을 글로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우리 아이들은 언제부터 글을 쓰게 되었을까? 옛날의 서당 시대에는 중국글인 한문만을 배웠으니 자기 표현을 글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했지만 일본글을 읽고 쓰는 공부였으니 이때도 아이들은 글쓰기로 하는 표현의 길이 꽉 막혀 있었다. 다만 1920년대와 30년대에 겨우 몇몇 잡지를 중심으로 일부 어린이들이 글을 써서 발표했을 뿐이다. 여기서 지난날 우리 아이들이 글을 어떻게 썼던가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먼저 잡지 ≪어린이≫에 실려 있는 아이들의 글을 대강 찾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글을 보기 전에, 글을 쓰도록 권해서 모으는 광고를 어떻게 내었는가 하는 것부터 살펴보겠다.
    1923년 3월에 나온 ≪어린이≫는 이 창간호(모두 12쪽)부터 어린이 독자들의 글을 뽑는다는 광고를 내고 있는데, 책 맨 뒷쪽에 나 있는 광고문이 다음과 같다. (맞춤법만 오늘날 것으로 고침.)

    懸賞 글 뽑기
    感想文, 遠足記, 편지글, 日記文, 童謠.
    이상 무엇이든지, 새로 짓거나 學校에서 作文時間에 지은 것 中에서 보내시면 뽑아서 책 속에 내어 드리고, 좋은 賞品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크게 工夫에 有益한 일이오니 빠지지 말고 보내 주시되, 꾸미느라고 애쓰지 말고 솔직하게 충실하게 쓰기에 힘쓰십시오.
    每行 十五字式 二十行 넘지 않도록 정결하게 써서 京城 慶雲洞 天道敎 小年會 編輯室로 보내십시오.
    封套에 반드시 懸賞 글 뽑기라고 써야 됩니다.

    이 광고문은 3호에도 거의 같은 글로 나와 있는데, 보내온 글이 없었는지 아이들의 글은 실려 있지 않고, 8호에도 실려 있지 않다. (4호에서 7호까지는 영인본이 없음.) 그리고 8호(모두 40쪽, 1923.9) 마지막 장에서 이번에는 광고 내용을 달리 해서 다음과 같이 내어 놓았다.

    懸賞 글 뽑기
    問題 '나의 所願'
    당신의 願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앨써 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지어 보내주십시오. 一行十五字·二十行 以內 期限 九月 三十日.
    이 外에 感想文 遠足記 편지글 日記文 童謠도 언제든지 뽑습니다.
    보내실 때 반드시 그 號치 讀者證을 붙여서 보내시고 封套에는 반드시 懸賞 글 뽑기라고 써야 됩니다.

    이래서 그해 11월에 나온 10호에 처음으로 [뽑힌 글] <나의 소원> 일곱 편이 실렸다. 여기서 그 중 세 편을 옮겨 본다. (맞춤법을 오늘날 것으로 고쳤고, 가끔 나오는 한문글자도 모두 한글로 바꾸었는데, 한글로 써서 뜻을 알 수 없는 말은 묶음표로 한문 글자를 적어 놓기로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
                                       해주 남본정 변귀현
    저는 무엇보다 돌아가신 어머니 뵙기가 소원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한결같이 위하고 귀해 주시던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저의 어머니는 병으로 여러 달을 고생하시다가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눈에는 지금도 어머니 얼굴이 자꾸 보입니다. 동무들하고 재미있게 놀다가도 동무들이 어머니 부르는 것을 보면 부럽고 슬퍼서 못 살겠습니다. 그러다가 밤에 집에 돌아와서 자리에 누워 잘 때면 눈물이 자꾸 나서 못 견디겠어요. 조그만 새들도 어미가 있어서 사랑해 주는데 나는 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어머니 뵙기가 저의 뼈에 맺힌 소원입니다.

      돈
                                  경북 연일 소년회 김찬호
    나의 소원은 '돈'이 올시다. 즉 큰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빈한한 가정에 나서 남과 같지 못한 것이 많은 중에 제일 공부 못하는 것이 원한입니다. 보통학교는 겨우 졸업하였으나 중등학교에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하고 아무 희망이 없이 있으니 어찌 돈이 소원되지 않겠습니까. 또 그것뿐 아닙니다. 나의 동무 몇 사람과 우리 시골 소년회를 조직하였으나 아무도 찬조해 주지 않고 우리 소년끼리만 유지해 가는데, 돈이 없어서 마음과 뜻같이 회가 잘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시작한 우리 소년회가 언제까지던지 잘 되어가도록 하기가 소원이니 또 돈이 소원됩니다. 
    내가 돈을 소원하는 것은 금의옥식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많았으면 나의 신세와 같이 빈한하여 공부 못하는 소년들을 그들의 마음대로 공부시켜 우리 나라에 안 배운 동포가 없이 되고 소년회를 시골마다 설립하여 다른 문명국 소년보다 씩씩한 소년들이 되도록 하기 목적입니다.

      불쌍한 동무 없기
                                    용천 불이 보교 이병관
    나는 가난한 동무 어린이들의 신세를 제일 불쌍하고 가엾게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하고 힘에 넘치는 일을 땀 흘리며 애써 하는 경황도 참혹하거니와 공부 못한 탓으로 장래에 매사를 칠칠히 해 나가지 못하여 남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이 되어 슬픈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하고 불쌍하게 생각됩니다. 나의 소원은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없이 되는 것입니다.
    아, 하누님. 언제나 한결같이 똑같은 세상이 되어서 가난한 사람과 불쌍한 동무가 없이 다 같이 즐겁게 재미나게 살겠습니까.

      공부하기
                                       대구 남산정 한선애
    저는 하동구 읍내라는 조고만한 촌락에서 사는데 보통학교는 간신히 마치었으나 부모님 속박으로 집안에 갇혀 앉아서 서울은 못 가더라도 대구라도 유학 가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하동 공립 보통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무들이 타관으로 유학갈 때마다 저의 어린 가슴은 하도 답답하여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른 나무가 봄철을 만나듯 저도 소원 이룰 때가 와서 지나간 8월 30일에 경성으로 공부가는 오빠를 따라 대구에 와서 명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남과 같이 공부하고 있으니 바라던 소원은 풀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푸니까 또 새 소원이 생겼습니다. 부모형제 만나 보고 싶은 것도 원은 원이지마는 그보다 더 큰 소원은 인제 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우등 졸업하고 또 더 높은 학교 공부도 잘 하고 외국까지라도 가서 끝끝내 공부를 잘 해 가지고 와서 우리 나라 여자계에 큰 일꾼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렇게 공부를 시켜 주실는지 큰 걱정이며 또 큰 소원입니다.

    그 다음 11호(23.12. 모두 22쪽)에는 독자 두 사람이 보낸 동요('유행동요'라 했는데, 전래동요를 가리킴) 두 편이 실려 있고, 다시 그 다음의 신년 특별호(24.1 모두 48쪽)에는 광고문을 다음과 같이 내어 놓았다.

    讀者作品大募集
    ◎ 作文 편지글 日記文 童話 童謠
    이 여러 가지를 모아서 잘 진 것을 뽑아서 책에 내어 드리고 상품 드리겠습니다. 학교에서 쓴 것이거나 새로 지은 것이거나 자기 마음에 가장 잘 되었다고 믿는 것을 글씨 똑똑하게 써서 보내 주십시오. 여러분의 글짓기가 점점 나아지도록 장려하기 위하여 人數 제한도 없고 日字 제한도 없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잘된 것 있는 대로 상품을 드리겠으니 당신의 동무들께도 많이 권고하여 많이 보내게 해 주십시오.
    一行十五字씩 三十行 以內 (童話뿐만은 制限 없습니다.) 보내실 때에 그달치 讀者證을 붙이고 내실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讀者證 없으면 무효입니다. 

    8호 광고에서 <나의 소원>이라고 제목을 정해 놓으니까 다른 글이 들어오지 않아서 다시 이렇게 자유롭게 쓰도록 했던 것 같다. 이전에 낸 광고문과 다른 것은 <글 뽑기>란 광고 제목이 <독자작품대모집>으로 되었고, '감상문' '원족기'라 하지 않고 '작문'이라고 한 것, 그리고 '동화'가 들어 있는 점이다. 이 '동화'는 길이도 제한하지 않았는데, 문학작품을 쓰고 싶어 하는 어른들(좀더 나이가 든 독자들)을 상대로 했던 것이다.
    이래서 이 ≪어린이≫지에 자유롭게 제목을 가려서 쓴 글이 처음으로 실리게 된 것이 1924년 5월호였다. <어린이날 축복호>라고 되어 있는 이 5월호에는 뽑힌 글 다섯 편이 실려 있는데, 글마다 끝에 뽑은이가 짧은 평을 해 놓았다. 그 다섯 편을 들어 본다.

      눈꽃 나리는 아침
                      개성 제일송도보교 4학년 김영종 15세
    나는 오늘 일찍 일어나서 방문을 나왔다. 뜰에는 하얀 눈이 두꺼웁게 깔리었다. 그 우에 하늘로부터 목화송이 같은 눈이 함박으로 퍼붓는 듯이 자꾸자꾸 간단없이 쏟아진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아, 눈이 오신다. 많이 오신다. 아아, 좋다." 하고 야단을 끄러대인다. 나도 뛰어나가서 같이 떠들고 싶었다. 추녀 끝 아래 담 모퉁이에서는 참새들이 목을 움치고 몸을 떨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눈 쏟아져 오는 것을 쳐다보니까 뽀얀 공중은 흑진(黑塵) 세계에 난리가 난 것 같다. 한참 치어다보면 현기가 나서 아찔아찔하여진다. 그러나 볼수록 참 재미있다. 먼지같이 까만 것이 이리저리 몰려 다니다가 가까이 오면 점점 크게 되어 흰 나비같이 팔팔 날아서 지붕에도 땅에도 나려 앉고 나려 앉고 하여 조금도 끊어지지 아니한다. 잎 떨어진 나무가지에는 때 아닌 백화(白花)가 만발하였다.
    (선자) 퍽 고요하게 보고 또 잘 썼습니다. 눈 오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바쁘던 일주간(일기문)
                                      언양 소년단 신고송
    1월 1일 월요 난(暖)
    기다리던 가극회는 모레나 극의 연습을 시작하겠다. 종일 딴 일은 한 가지도 안 했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면 우리 소년단도 영영 발전하겠다고 생각했다.

    1월 2일 화요 소한(小寒)
    무대에 쓸 솔을 구하러 산에 갔다. 오늘은 무대를 만드노라고 해가 졌다.

    1월 3일 수요 난(暖)
    기다리던 오늘은 벌써 정오가 되었다. 단원이
    모두 시내로 광고 돌렸다. 오늘 밤 순서에 동화 암송과 밥강엿(극)과 딸기와 금상자(극)와 소화(소화)의 많은 책임을 내가 가졌다. 첫날은 무사히 치른 것이 기뻤다.

    1월 4일 목요 난(暖)
    해가 질 때까지 연습하였다. 오늘 밤에도 동화 암송과 홍그래비와 지렁이(극)와 혹(희극)의 여러 가지를 하게 되었다. 극을 마치고 만세 세 번 부르고 역자와 위원의 위로회가 있었다. 우리들은 이번 계획에 성공하였다고 기뻐하였다.

    1월 6일 토요 소한
    지난 닷새 동안의 피로움을 풀려고 종일 쉬었다. 조금 추운 날이다.

    1월 7일 일요 소한
    오늘은 시일(侍日)(공일)이다.
    저녁 아홉 시에 청수를 모시고, 우리 조선 소년 우리 언양 소년의 전도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선자) 이 분의 정성있는 노력은 참으로 탄복합니다. 일기도 요령을 따서 잘 적었습니다.

      뽀뿌라
                       대구 사립 해성학교 5학년 양상구
    울 밑에 옷 벗고 서 있는 뽀뿌라 마른 가지야. 
    너도 옷 같은 잎이 없으니 몹시도 춥겠구나!
    날은 이렇게도 차고 쌀쌀한데, 그대로 어떻게 봄까지 견딜 터이냐.
    양춘삼월이 돌아오면 울 밑 모든 꽃들은 소리 없는 웃음으로 연두 싹 돋는 너의 회생을 반겨하고, 양춘을 찾는 소조(小鳥)들과 그는 찾는 매암이가 좋은 음악조차 아뢰일 터인데....... 벌거벗고 서 있는 뽀뿌라 마른 가지야, 저렇게 벌거벗은 몸으로 어떻게 그때까지 견딜 터이냐.
    모질게 부는 바람에 네 가지가 소리쳐 울 때에 내 마음 애처로워 돌아보지 못하겠구나.
    아! 양춘삼월 어서 와서 뽀뿌라에게 기쁨을 주어라.
    (선자) 걸작입니다. 훌륭히 잘 되었습니다. 거의 시 같습니다 그려. 일등, 일등상입니다.

      눈 오는 밤
                                  광주군 송파시장 이태현
    펄펄 날려오는 눈은 끊기지 않고 나려온다. 벌써 너댓 치(四五寸)나 쌓였겠지. 전등의 빛은 희미하여진다. 이웃집에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유리창을 열고 본즉 변치 않고 그저 쏟아지는 눈이 보인다. 버석버석하고 이번에는 열어 논 덧문을 따리고 시치미를 뗀다. 사람 다니는 소리도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전선이 느즈러진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벌써 어떤 집이든지 다 자겠지. 아아, 춥다. 피곤해 하시는 할머니 모양이 보인다. 눈은 변치 않고 그저 나린다. 차고 쓸쓸스런 밤이다.
    (선자) 쓸쓸하고 고요한 눈 오는 밤을 조용하게 잘 보았습니다.

      봄이 왔다
                                    개성 본정 330 안흥윤
    차디찬 겨울은 어디로 흔적 없이 가 버리고 따뜻하고 기쁜 새 봄이 어디로부터 소식도 없이 왔다. 먼 산은 나를 보고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방그레 웃는다. 안개인지 연기인지 보라빛으로 운동회에 휘장 친 것처럼 둘러 있다. 앞산 드렁 우에 불에 타서 꺼멓게 잠들었던 잔디에서도 지금은 때를 만나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나온다. 그리고 조그만 새들이 자칫 다 나온 것처럼 이 나무 저 나무로 바쁘게 날아다니며 기쁜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인제 곧 꽃이 피겠지. 나비도 와서 춤을 추겠지.......
    아아, 봄은 참 기쁜 때다. 만물이 다 기뻐하는 봄이로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봄의 노래를 이렇게 불렀다.

    봄아, 그리던 봄아.
    따뜻한 바람
    솔솔한 비로
    힘껏 나의 얼었던
    뭉켰던 맘을
    스쳐 눅혀라.

    (선자) 재미있는 솜씨입니다. 힘써 공부하십시오.

    <글쓰기> 창간호 (1995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