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08-29 15:22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4,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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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미 마을 느티나무 아래서/한길사/2005 차례 이오덕 할아버지의 노래 권정생 감나무 단충잎 매미소기1 이름 없는 시1 나의 꿈 나는 구름이다 나는 나무다 누워서 목련잎 고구마와 단풍잎 감자를 먹으며 이 좋은 햇빛 속에 우리 말 우리 얼 우리 말이 있기에 흔들리는 지구 까치집 나무 소쩍새 소리 고양이 매미 소리2 매미에게1 매미에게2 말매미 소리 설날에 거는 전화 설날 일기 명치절 팥죽1 팥죽2 팥죽3 예언 내 어릴 적 크리스마스 알 수 없느 srjt 이름 없는 시2 대추1 대추2 가을 아침 햇빛 밤 살구나무 대추나무 입원실에서 고양이1 고양이2 덤불딸기 그때와 지금 개 우리 찌개 끓이기 바느질 2천 2년 12월 22일 동짓날 잠자기 전 바그다드의 ㅂ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 트럭 장사꾼의 소리 권정생 선생님1 권정생 선생님2 죽어야 한다.
이오덕 할아버지의 노래 권정생 아동문학가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계속 머리를 갸우뚱거혔습니다. 과연 선생님이 쓰신 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문학비평문을 쓰실 때의 칼날 같은 말새도,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따지고 대드는 듯한 당당한 모습도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한쪽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어머니께 보채는 응석받이 어린이가 칭얼거리는 듯한 노래였습니다. 늙으면 도로 어린이가 된다더니 선생님이 이렇게 늙으신 모습으로 우리 앞에 계시다는 게 가슴이 찡하기도 했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외었다고 우쭐거리는 세상이라 동지가 되어도 촌스런 팥죽이란 말 아들 며느리한테도 차마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되었지요.
〈팥죽〉이란 시를 내리 세 편이나 쓰셨는데 그 세 번째 노래인 마지막 넋두리가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왜 먹는 노래를 이렇게 많이 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자, 고구마, 딸기, 밤, 감 대추, 시루떡 그리고 팥죽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고향이 그리워지고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는 시가 많아졌습니다.
쓸쓸한 가을 발밑에 밟히는 이 대푸를 어찌할까 그렇다, 나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 이 보석알을 주워야지 바랭이 풀 속에 숨어 있는 이 가을의 선물을 손에 받으면 아, 그 어디서 들려오는 우리 아버지 목소리 “덕아, 대추 많이 떨어졌다. 주워 먹어라.“
〈대추1〉의 끝부분입니다. 어머니는 아홉 살 때 돌아가시고 스물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사남매 중 외아들이셨던 선생님은 귀여움과 외로움을 함께 겪으면서 자랐습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다음, 그 뒤에도 행복한 가정은 없었습니다. 평생을 혼자처럼 살았습니다. 산골 이곳 저곳 작은 초등학교만 다니며 힘든 교직생활을 끝내고도 돌아가실 때까지 교육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어린이문학비평과 아동시론에, 엄청난 분량의 《우리글 바로쓰기》는 혼탁해진 우리말을 바로잡는 데 큰 밑바탕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런 선생님이 마지막 남기신 이 쓸쓸한 노래는 기존 시단에서는 홀대를 받겠지만 고달프게 갈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겐 많은 위안이 될 것입니다.
석탄백탄 타는데 연기나 풀풀 나고요 이 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풀풀 안 나네.
이런 민요조차 끊겨버린 오늘날, 이오덕 선생님의 시는 또 다른 백성들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보시는 산과 들과 하늘까지 소박한 한 폭의 그림 같고 조용히 들으시는 세상소리는 그대로 정다운 음악이 되었습니다.
개 삽니다… 염소 삽니다… 고양이 삽니다… 다람쥐 삽니다… 개구리 삽니다… 뱀 삽니다… 너구리 삽니다… 개애 삽니다…
수박이요 수박! 참외요 꿀참외요! 사과요 사과! 마늘요 마늘요! 양파요 시금치요! 감자요 배추요오!
〈이름 없는 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장사치들의 소리가 정답게 들리는 이 세상에 이젠 선생님은 안 계십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이렇게 외치며 떠들다가 하나 둘 조용히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돌아가겠지요. 선생님은 왜 어린애처럼 양파요! 시금치요! 배추요! 를 하나 하나 적으셨는지 읽는 나에겐 이런 것도 가슴이 짠해집니다. 선생님은 그 어느 하늘에서 지금도 조용히 이런 소리를 귀담아 듣고 계실까요. 2005년 7월 권정생
대추2 내 어릴 적 가물가물 파랑빛 가을 하늘 그 꼭대기 축 휘어늘어진 가지에 오롱조롱 새빨간 대추알들 언제나 눈부시게 쳐다보았다. 가을 들판으로 나가는 마을 끝집 돌담 위로 가물가물 쳐다보이던 파란 하늘 빨간 대추알들…
내 서른 살, 마흔 살. 그리고 쉰 살을 갇혀 살던 학교 유리창 안에서는 언제나 그 어느 산속 마을 외딴집 돌담 위에 호박덩쿨 올리고 지붕 위에 박덩쿨 올리고 마당가에 옥수수 심어 강아지 한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도 함께 사는 꿈을 꾸었다. 사립문 안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 가을이면 빠알간 대추알들 쳐다볼 수 있는 집을.
세월은 화살 같고 흐르는 물 같아 내 나이 어느덧 일흔다섯 이제 내 손으로 밭을 갈지 못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마당 앞에 대추나무 한 그루 이 가을 오롱조롱 하늘 위에 매달린 대추알을 쳐다볼 수 있는 방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다. 대추나무 밑에서 끌려가고 맞아죽고 한 그 숱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빠알갛게 익은 대추알을 하늘 위로 쳐다보는 이 즐거움을 가질 수 없었던 그 숱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1999.10.8 (p.99~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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