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펴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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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6-08-26 05:46
    시정신과 유희정신/굴렁쇠/2005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5,033  
    시정신과 유희정신/굴렁쇠/2005
    (197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했던 책을 2005년 조금 다듬어서 다시 펴낸 것임.)
    차례
    머리말․이원수
    제1부
    시정신과 유희정신
    동시란 무엇인가
    부정의 동시
    진실과 허상
    표절 동시론
    모작 동시론
    아동문학 작가의 아동 기피1
    아동문학 작가의 아동 기피2
    제2부
    열등의식의 극복
    동심의 승리
    아이들은 어떤 동화를 재미있게 읽는가
    아동문학과 서민성
    아동문학의 문제점
    어린애 흉내와 어른의 넋두리
    책끝에
    글쓴이 소개
    찾아보기
    머리말
     이오덕 씨는 우리 나라 아동문학에 있어 가히 황무지라 할 수 있는 비평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활동을 해 오는 분이다.
     그의 평론은 건전한 사상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그의 필봉은 신랄하며 항상 논의 대상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실로 씨의 평론은 아동문학 50년의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본격적인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혼돈 상태에 있는 아동문학 이론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작가․시인들에게 밝은 진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씨가 글에서 항상 견지하고 있는 것은 문학의 서민성 옹호 정신이며, 인생을 위한 문학에의 열의이다.
     동시에 대한 그의 논평은 오늘날 동시의 여러 경향을 분석하고, 특히 시인들의 아동관과 시작(詩作)과의 관계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기교주의와, 아동을 떠난 동시에 대해 확고한 신념으로써 발언하고 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 <동시란 무엇인가>등에서 씨는 동시의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으며, <아동문학과 서민성>에서 아동문학의 귀중함이 서민성을 떠나서는 얻기 어려움을 증명하고 있다.
     씨는 일찍이 그의 오랜 경험과 연구에서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아인각․1965), 《아동시론》(세종문화사․1973)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는데, 아동문학 이론의 연구와 그 확립은 이미 그 때부터 쌓아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평론집에 실린 글들은 씨가 근년에 발표해 온 역작들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글들이요, 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켜, 아동문학계에 비평 활동을 자극하기도 한 것들이다.
     이 책이 한국 아동문학의 앞길을 밝혀 주는 횃불이 되어 줄 것을 믿고 즐거이 서문의 자리게 몇 마디 반가움의 뜻을 적는 바이다.
                                              1977년 4월  이원수
    열등의식의 극복
    머리말
     우리 아동문학의 현황을 말함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동이 읽지 않는 아동문학이 되어 있는 일이다. 그 다음 또 하나 큰 문제가 있다면, 이런 아동문학으로서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문제점으로 보지 않고 있는 상당한 수의 아동문학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고 동화고 대체로 시인과 작가의 자기 만족으로 쓰는 데 그쳐 있고, 아동은 2차적 독자로 밀려 나가고 혹은 애당초 독자의 대상으로 되지도 않고 있다. 그러면서 아동을 빙자한 작품이 범람하더니 최근에는 아예 아동이랑 머리말까지도 문학의 명칭에서 떼어 버리자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동문학의 부정이다. 아동문학이 아동에서 유리되어 있고, 그러한 상태를 아동문학의 발전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아동문학을 부정하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아동문학은 분명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주제와 제재(題材), 표현 등의 한정성에서 오는 아동문학의 특질을 잘못 이해하고 아동문학이 본격적인 문학이 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고 하여, 아동문학에 대한 아동문학 작가 자신들의 분신감이 조성되고 있다. 이런 모든 사태에서 판단되는 아동문학의 커다란 위기를 이제 우리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히 검토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 있다.
     필자는 아동문학 작가들의 아동 소외 내기 기피 태도와 아동문학 불신감, 일반 문학에 대한 선망과 모방 경향, 이러한 일련의 비정상적 현상이 아동문학 작가들의 열등의식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아동문학을 살리는 핵심 과제가 됨을 논하려 한다. 아동문학 작가들이 갖는 열등의식은 우리 민족의 대부분이 공통으로 갖는 일반적인 열등의식에다, 또 하나 일반 문학에 대한 차등 의식이 겹친 두 겹의 열등의식으로 되어 있다.
    1. 열등의식과 자주 정신
     먼저 우리 민족이 공통으로 갖는 열등의식이 어떤 것인가 살펴보자.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취직해 있는 젊은이라도 좋다)이, 시골 고향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찾아온 어머니를 가리켜 저건 우리 집 식모라고 제 친구에게 말했다는 얘기는 단순한 우화도 아니고 옛날 얘기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현실이다. 가난하고 약한 자신을 부끄러워하여 덮어 감추기에 정신을 잃고 있는 이 정신 상태는 봉건 시대 이후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이 되어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현실이 되고 있다. 끊임없는 외국 세력의 위협과 봉건 왕조의 학정과 그 뒤를 이은 군국주의자들의 총칼 앞에서 과연 서민들이 살아갈 윤리가 이것밖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근세 이후의 정치과 교육, 도덕, 종교, 학문, 예술 등 모든 우리의 문화는 이 치욕적인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적․민주적인 자각과, 한편 열등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불합리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열등의식을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되도록 조장하는 노예적 근성, 이 두 가치관의 대립과 상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철저한 열등감으로 살면서 그 열등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매우 불건전한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는데, 이 비뚤어진 삶의 방식을 필자는 다음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본다.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은 겉치레 생활이다. 남의 겉모양을 흉내 내고 화려한 겉치레를 하는 것이 모든 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모두가 그런 상태니 우리들은 그런 비뚤어진 상태를 오히려 정상으로 알 만큼 되었다.
     옷에 대한 것만이라도 잠시 반성해 보자. 얼마 전 고국을 다녀간, 미국에 있는 김호길 씨의 얘기인데, 그가 한국에서 공부할 때 집도 넉넉하지 못했지만 옷에 대한 관심이 워낙 없어서 여름철이고 겨울철이고 노상 시커먼 군복 염색한 것을 입고 헌 군화를 신고 다녔다 한다. 그러다가 장학생으로 뽑혀 영국으로 가게 되어, 신사들 사는 나라에 이런 옷으로 어떻게 견딜까 좀 염려가 되었는데, 막상 런던에 가니 그 곳 사람들이 모두 자기와 다름없이 허름한 옷차림이고 조금도 자기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어서 나 같은 사람은 한국보다 영국 같은 나라에 사는 것이 마음 편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 후 김씨가 미국에 갔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는데, 몇 해 전에 한국에 돌아왔더니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어느 친구가, 이 사람아 옷이 왜 그 꼴인가, 한국서는 그런 옷 입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억지로 끌고 가서 새 양복을 맞춰 주더란다. 과연 서울 거리에는 줄을 쭉 세운 바지를 입고 다니는 신사들과 눈부시게 화려한 옷을 걸치고 다니는 여자들로 넘쳐 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되어 새삼 놀라고, 이것이 내 조국의 모습인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세계적인 과학자가 고향 산마을에 와서, 헌 운동화를 신고 지례(그의 고향) 사투리를 쓰고, 미국서 자란 아이들을 데리고 보릿대 모자를 쓰고 들판에 나가던 것을 보고, 그가 고향에 왔을 때마다 한국 사람들의 들뜬 겉치레 생활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까닭을 필자는 잘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나라 사람의 위치에 선 김호길 씨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허한 생활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큰 집을 지어 살려고 하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겉이라도 꾸며 보이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척하고, 약한 사람이 강한 척하여 열등한 자기를 우자(優者)로 보이면서, 스스로도 그렇게 착각하고서 살아가려고 하는 심리 현상이다. 국제적인 모임에 참가하고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옷차림을 화려하게 해서 회의장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동남아의 후진국 대표들이었다고 하는데, 가난한 나라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한 모양이다.
     열등감의 비합리적 해소 방식의 두 번째로 들어야 할 것이 약한 자를 짓밟고 올라서는 생활 태도이다. 강한 자 앞에서는 꼼짝 못 하고 다만 복종하는 것을 예의로 알면서 약자에게는 강자가 되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강자에게 짓밟힌 굴욕감, 패배감을 보상하려 한다. 소위 약육강식의 이 생활 방식은 우리 민족의 몸에 깊이 박혀 있어,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의 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예화를 하나 들어 본다. 얼마 전에 케이(K) 마을 아이들이 학교에 올 때 책 보퉁이를 어떤 한 아이에게 모두 맡겨 메고 오게 한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아이들을 나무 그늘에 모아 놓고 조사를 한 일이 있다. 그랬더니 케이(K)마을 뿐 아니라 에이치(H)마을에서도 그런 일이 있어, 날마다 책 보퉁이를 남에게 맡기고 오는 아이가 여남은 명이나 불려 나왔다. 케이(K)마을도 에이치(H)마을도 모두 재를 넘거나 강물을 따라 학교까지 2킬로미터(km)의 통학 거리다. 케이(K)마을에서 남의 책 보퉁이를 날마다 재를 넘어 날라다 준 2학년 한 여자 아이(그 다음 날 부모들 얘기를 들으니, 이 아이가 밤마다 땀을 흘리고 헛소리를 했다는 것이다)는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에 사는 아이였음이 밝혀졌다. 에이치(H)마을에서 남의 책 보퉁이를 강물 따라 날라다 준 5학년 한 남자 아이는 ‘농막’에 산다고 했다. 농막이란 남의 땅을 소작하는 사람이 땅 임자가 두고 간 집에 들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아이들의 설명으로 알았는데, 에이치(H)마을에서 농막살이를 하는 집은 단 한 집뿐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사ㅅㄹ이 10녀 년 전 에스(S)군 어느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 놀랐다. 10여 년 전의 일이란, 재를 넘어 3킬로미터(km)를 통학하는 아이들의 보퉁이를 1학년의 어느 여자 아이가 날마다 등에 지고 날라다 주었던 일인데, 그 여자 아이의 아버지는 그 마을 어느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가 하루는 학교에 와서 눈물로 호소하기에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런 일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가 들어온 지 30년이 되었고, 근대화가 되고 있다는 지금에도 이러하니, 왜정 때나 봉건 시대에는 어떠했으랴.
     더욱 놀랄 일은 에이치(H)마을에서 책 보퉁이를 모아 나른 아이는 자진해서 그런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자진이란 것이 아무리 본인의 솔직한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남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거룩한 봉사의 정신을 발휘한 것이라고 칭찬할 수 없는 것은, 그 아이의 그 마을에서의 남다른 위치를 생각해서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봉건시대부터 물려받은 노예의 습성이요, 일제 때도 익혀 온 식민지 백성의 삶의 방식이요, 씻어 버리지 못하는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는 슬픈 민족의 몸짓이다. 이 열등감은 책 보퉁이를 자청해서 메어 나르거나, 메어 나르기를 강요받는 극소수 아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책 보퉁이를 남에게 맡기는 아동도 같은 차원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책 보퉁이를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지우는 아이들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 도시 아이들 앞에 열등감을 가지고, 서울의 아이들은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외국 학생들 앞에 열등감을 가진다. 이래서 어린아이 때부터 열등감을 철저하게 몸에 익히고 사는 것이다. 이 열등감은 강자 앞에서 굴복하지만, 약자 앞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것이 그 특성이 되어 있다.
     약육강식의 비인도적 사회는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다. 옛날부터 우리 농민들의 몸에 밴 관존민비 풍조도 이런 사회상의 일단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약육강식의 질서가 황금만능과 권력 숭배 풍조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래서 이것이 달리 좋은 말같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입신출세주의란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 유행 가사는 강자에게 짓밟히는 자가 저보다 약한 자를 향해 소리치는 자랑스런 호령이다. 평소에 받고 있는 굴욕을 보상받기 위해 비뚤어진 이기주의자가 행하는 추악한 배설 행위다.
     열등감의 소유자는 세 번째로 또 하나의 불건전한 해소 방식을 갖는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전혀 이룰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꿈속에서 그리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자위(自慰) 혹은 자기 마취 행위이다. 여기서 꿈이란 것은 현실을 딛고 서서 지향하는 어떤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란 토대를 아주 잃은 허공에서 심리적 유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몽이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은 병적인 해소 방식은 특히 예술과 문학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탐미주의적 경향이나 소위 순수문학이란 것은 바로 이런 인간의 심리 현상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열등의식의 세 가지 해소 방식, 겉치레로 강자나 우자나 혹은 내용이 충실한 자인 척하고, 혹은 저보다 약한 자를 괴롭힘으로써 강자가 되고, 또는 엉뚱한 꿈속에서 저 혼자 만족을 하려고 하는, 이런 태도는 모두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짓이다. 그것은 열등감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그런 상태에 묶여 있도록 할 뿐이다. 자신을 일종의 마취 상태에 빠뜨려 놓고 남에게는 해독을 주는 비인간적 삶의 태도다. 개인이 이런 상태에 빼졌을 때 그는 사람다운 생각이나 감정을 갖지 못하고 가장 부도덕한 행위를 유행과 관습에 따라 예사로 하게 되며, 한 사회가 이런 사람으로 충만했을 때 그 사회는 타락하여 구제받기 힘들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이 만드는 모든 문화라는 것이 비뚤어진 삶의 방식을 경고하고 교정하려고 하는 편보다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고 조장하려고 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열등감은 그것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거나 다른 행위로 보상받는 데서 는 극복이 불가능하며, 다만 열등감 자체를 버려야 한다. 열등의식을 초극하는 문제는 특히 경제적 후진 사회에 있어서 그들의 자주력을 획득하는 원동적 정신을 확보하는 문제가 된다. 그리하여 모든 문화의 지표가 이 문제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만약 다른 모든 문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지 못할 때는 문학만이라도 깨어 있어 정신을 회복하는 활력소를 공급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 문화의 기본 과제를 여기에서 찾아내어 남북 분단의 현실에 밀착시키면 문학 창조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다. 여기서 특히 역설해야 할 것이 아동문학의 사명이다. 아동문학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정신을 좀먹고 있는 열등의식을 소멸시켜 주는 해독제 노릇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와 학교에서의 교육이 이룰 수 없었던 막중한 임무를 효과 있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2. 아동문학 작가의 열등의식
     아동문학이 우리 민족의 어린이들에게 침투되어 있는 열등의식을 불식시켜주는 혈청 작용을 감당해야 한다면, 과연 우리 아동문학이 이 귀중한 사명을 어느 정도 수행하여 온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긍정적으로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여 온 것 같다. 우리들의 아동 문학가를 훑어보면 과거보다 지금에 이르러 아동문학은 더운 민족문학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 특히 그들 스스로 열등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상당수의 작가들에 의해 아동문학은 아동들의 열등의식을 지양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는 문학이 되고 있음이 뚜렷하다.
     우리의 근대적 아동문학이 출발하던 때, 곧 방정환(1899~1931)․마해송(1905~1966)․이주홍(1906~1987)․이원수(1911~1981), 이들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적어도 아동문학에서 아동은 주인이 되어 있었고, 작가는 민족과 어린이를 위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8․15를 지나고 6․25를 거친 오늘날에 와서 그러한 이념은 대부분의 작가들에게서 찾기 힘들게 되었다. 민족과 어린이의 앞날에 대한 신념을 확립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아동의 열등의식을 없애줄 수 있는 문학을 창조할 능력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면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쓰게 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것,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질적 이익과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대한 관심, 그리고 오락적 취미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모든 것이 금전으로 환산되는 물질적인시대가 되었다. 반세기 전에는 젊은이들이 아무런 보수도 없이 날마다 몇십리씩 밤길을 걸어 산간벽촌에 가서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글을 가르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작가들이 글을 써도 원고료를 받을 줄 몰랐다고 하는데, 요즘 그런 사람이 있다면 멸시의 대상밖에 안 된다. 이념의 시대는 가 버리고 천박한 이해타산으로 살아가는 황금만능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특수한 개성과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작가들도 이런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열등의식으로 살아간다. 거기다 아동문학 작가들은 또 하나의 열등의식을 안고 있다. 그것은 다른 일반 작가들에 비교해서 물질적 대우가 박약하다는 데 기인하는 것이다. 아동문학 작가들이 받는 고료는 일반 작가들의 반액도 안 되고, 그런 고료조차 얻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다. 이리하여 아동문학 작가들은 아동문학 자체에 대한 신념의 결핍에서 오는 상업주의적 타락에다, 일반 작가들에 대한 등차 의식이 겹친, 두 겹의 열등의식을 안고 그 혼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쓴 아동문학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개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방과 어른의 취향, 아동 세계에 대한 몰이해, 동화의 무국적(無國籍) 경향, 동시의 난해성, 감각적 기교 편향, 갈피를 못 잡는 궤변적 이론과 저급한 감정을 발산하는 잡문의 횡행 등은 모두 작가들의 정신의 타락에서 오는 현상이다.
     작품에 대한 언급은 뒤로 미루고, 아동문학 작가들의 정신에 잠재해 있는 자기모멸 의식을 그들의 말에서 살펴본다. 흔히 아동문학은 천대받는다, 소외당한다, 서자 취급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 말을 생각해 보자.
     물론 사실이 그러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충분히 할 소리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말이 어디서나 아무 거리낌 없이, 다시 말해서 아동문학 작가들의 자기반성이 수반된 무게 있는 소리가 되지 못하고 다만 문단적인 자리 잡기와, 작품 쓰기보다 그런 발언 자체에 더 관심을 둔다면 문제가 되고, 사실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누가 천대하고 누가 소외했다는 말인가? 만일 충분히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자기를 천대하고 소외시키는 것밖에 안 된다. 문화 사업을 한다는 출판업자들이 왜 고료를 적게 주고 책을 내 주지도 않는가? 그러나 출판업자들의 대답은 당당하다. 아이들이 사 주지 않는 책을 출판해 달라고 하지 말고 당신들 돈 있으면 자비로 내든지, 아니면 좀 더 재미있는 작품을 써서 아이들이 읽도록 해 보라고 할 것이 뻔하다. 서자 취급은 누가 한단 말인가? 아동문학은 적자가 될 만한 노릇을 하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민족이라는, 아동이라는 ‘아버지’를 잘 받들어 모시는 적자 노릇을 하였던가? 아이들은 버려두고 작가 자신의 장난감으로, 오락감으로 즐기면서 누구에게 적자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소외하지 말라, 서자로 다루지 말라… 이 말은 결국 열등의식을 극복하지 못하는 아동 작가들이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라는 이름으로 일반 작가와 동일시되기를 바라는 공허한 말이 되어 있다. 거의 아무 효과도 거둘 수 없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우리도 작가다!’고 하는 자기 존재의 시위와 열등의식의 표현이다.
     다음, 이것 역시 아동문학 작가들의 말인데, 아동문학 작품만 쓰는 사람보다 다른 일반 문학 작품도 겸해서 쓰는 사람이 보다 유능한 작가라고 하는 말이다. 이것이 어떤 근거에서 하는 말인지, 설사 어떤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동문학 작가들이 성인 문학(이런 말이 어색하지만 편의상 쓰는 것이다)을 선망하여 될 수 있으면 아동문학에서 이탈하고 싶어 하고, 아주 이탈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장르를 겸해서 활동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는 때에 그런 말은 매우 해롭다. 물론 일반 작가들이 아동문학 작품을 쓰는 것을 환영할 일로 보아야 하듯이, 아동문학 작가라 해서 소설이나 시를 못 쓸 것 아니고 작가의 세계가 여러 장르에 걸친 광범위한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더라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동문학 작가들이 아동문학에 대한 신념을 잃고 열등감에 젖어 있는 상황에서는 아동문학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도 함부로 다른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를 분별없이 찬양할 수만은 없다. 소설이나 시를 겸해서 쓰는 아동 작가가 더 유능하다는 말은 아동문학 작품만 쓰는 작가들의 열등감을 조장하는 말밖에 될 수 없고, 또 다른 뜻이 있다면 일반 문학 작품을 겸해 쓰는 사람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것인데, 이 우월감이 사실은 또 문제가 된다. 그것 역시 아동문학 작가로서의 자기 멸시요, 우월감 자체가 열등감을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아동문학이란 장르를 뚜렷이 인정하고, 또 아동을 위한 작품을 쓰는 유능한 작가가 많이 나와 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아동문학 작가는 될 수 있으면 아동문학 이외의 작품은 안 쓰고, 쓰더라도 덜 쓰고, 작가의 힘을 아동문학에 보다 많이 바쳐 주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 유능한 작가일수록 그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무능한 작가는 무능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인 문학 쪽으로 가 버리지도 못하고 아동들에게 열등감만을 안겨 주고 있으니, 이것이 탈이다.
     다음 또 한 가지, 최근 몇 사람의 발언 중에 소위 교직 작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에 대해서다. 아동문학가 중에 교직에 있는 사람, 특히 초등학교 교사가 많다면서 이들에 의해 아동문학의 질이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근거가 될 아무런 자료도 제시할 수 없는 말이요, 매우 그릇되고 해로운 편견이다. 수가 많으면 자연 유능한 작가도 있고 서투른 이도 들게 된다 질이 떨어진 것이라면 교직 이외의 작가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런 발언의 동기가 문제 되어야 한다. 문인들의 직업에서 교사보다 기자나 관리나 사장이 더 훌륭해 보이고, 같은 교직자 중에서도 초등학교 교사보다 중․고등학교 교사가 더 유능하고 대학 교수는 보다 더 훌륭한 작가같이 보인다면, 그리고 지방에 있는 작가보다 서울에 있는 작가가 더 우월하게 여겨진다면 이거야말로 비참한 열등의식이다. 특히 아동의 생활 세계를 작품에 담으려는 경향을 ‘작문적 취향’이라고 하여 아동 세계를 멸시하는 말과 함께 초등학교 교사들을 덮어놓고 비방하는 것은 무지(無知)하기도 하지만, 그런 불성실한 발언 자체가 같은 아동문학 작가들을 직업의 계층적 의식으로 멸시하고 까내림으로써 스스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여기려는, 좀 저열한 심성의 발로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것이 열등의식 소유자의 일종의 약육강식적 보상 행위라는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동문학에 대한 신념의 상실이 가져오는 물질주의․외형주의의 파탄은 이밖에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작품보다 문단 사교(社交)를 위주로 하고, 이름 내기에 급급하여 작품집에 서문을 받아도 아동문학인보다 일반 문단의 유명 인사의 이름을 얻고 싶어하고, 동인지나 잡지의 활자가 가로짜기보다 세로짜기로 되고 한문 글자를 무제한으로 쓰고 있는 경향 같은 것이 모두 주체성을 잃은 짓이다. 작가들의 서울 집중 현상―기왕 원고료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형편에서 아동문학 작가의 서울 집중 현상은 일반 작가의 그것보다 더욱 명분이 안 선다―도, 근년에 들어 외국으로 이민을 가 버린 아동문학 작가가 여럿 있었던 사태도 모두가 민족과 아동에 대한 신념이 사라진 자리에 물질적 상품주의가 들어앉은 풍조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는 결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동문학 작가의 열등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이 쓰고 있는 작품 자체가 될 것이다.
    3. 동시에 나타난 열등의식
     아동을 위한 우리 시문학의 변천을 말할 때 흔히 동요에서 동시로, 동시에서 시로 발달하였다고 하고, 그것을 당연한 발전 과정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필자는 특히 동시에서 시로 발전하였다는 단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는다. 적어도 현재 양적으로 많이 생산되고 있는 이러한 동시, 아이들이 읽지도 않고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이런 동시를 시의 단계라고 한다면 필자는 이것을 아동을 위한 시의 정상적 발전 단계로는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시도 동시도 될 수 없는 작품들은 아동문학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어른들이 읽는 시의 형식을 모방함으로써 아동문학적인 겉모습을 벗어 난 것처럼 보이려는 ‘성인시’(成人詩)동일시 현상이다.
     동요․동시에 한하지 않고 우리의 근대적 아동문학이 처음으로 출발했던 반세기 전에는 아동문학이 어른들의 문학적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씌어지는 오락물이 아니라 민족과 아동에 대한 명확한 주체적 자각에서 창조된 것이었음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이 자각이란 것은 일제와 봉건 사회라는 두 겹의 억압에서 아동을 보호하는 것이 일제의 탄압이 한층 더 가혹해지고, 한편 일제의 문학이 밀려들어 옴에 따라 우리의 아동문학은 일부 소수의 작가를 제외하면 대체로 현실을 도피하는 동심청사주의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것은 일본의 아동문학이 그대로 수입 번역된 모습이요, 일본의 문화적 침략에 결과적으로 야합되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으니,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어린이들의 현실에는 눈감고, 행복한 남의 나라 어린이들의 생활과 조금도 다름없는 세계를 그려서 아동문학이라고 보여 줌으로써 우리 어린이들의 열등의식을 한층 조장하는 일에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일제 침략자들이 식민지 어린이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 주는 교육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 동심천사주의가 8․15 이후에 얼마쯤 그 겉모습이 달라졌지만 뿌리 깊은 전통이 되어 오늘날까지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필자는 다른 여러 글들(〈시정신과 유희정신〉, 〈아동문학과 서민성〉, 〈부정의 동시〉)에서 논한 바 있다. 특히 산문에서보다 동시에서 이 천사주의는 완고한 뿌리를 내려 많은 동시인들의 아동관․문학관을 지배하고 있다. 해방 직후와 자유당 치하의 그 물질적 곤궁(困窮)이 극했던 때에도 이 천사주의의 망령은 불행한 대부분의 어린이를 외면하고 황금의 세력과 야합이 되어 어린이들에게 열등의식만을 강요하였고, 오늘날에는 아동이 살아가는 ‘생활’과 ‘진실’을 거부하고 아동이란 존재마저 기피하는 괴이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동심을 위한 문학이 변모하여 천사주의라는 식민지 문학으로 타락하였다는 것은 작가들의 문학관이 민족과 아동을 주체로 파악한 민족문학에서 국적이 없고 성격이 없는 문학으로 옮겨진 것을 말해 준다. 또 그것은 아동문학의 주체요 목적이었던 아동이 문학의 방편이나 도구로 되어 버린 사실을 말해 준다. 아동문학은 이렇게 하여 주체적인 창조의 문학이 되지 못하고 주체 상실의 모방 문학, 열등의식의 문학으로 전락하였다. 한때 도덕 교과서의 문장과 다름없는 작품이 많이 나와서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이것도 아동을 주체로 의식하는 문학이 아니라 아동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어른중심의 아동관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동심천사주의의 발생과 변모 과정을 다시 한 번 간추려 본다. 민족의 가난과 슬픔을 노래하던 우리의 동요가 밀려든 일본 제국의 겉보기 아름다운 문학 앞에서 결코 고울 수만 없는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하여 감추려고 했을 때, 참된 우리 민족의 아동 세계를 노래하는 양심과 지혜를 잃고 다만 화려한 남의 것에 정신을 파는 결과가 되었다. 아동을 장난감으로 어루만지고 재미있어하는 동신천사주의의 짝짜꿍 동요는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아동과는 산관이 없는 넋 빠진 어른들의 장난감 문학이었고, 침략자 일제가 이 땅에 피어나기를 원했던 식민지 문학이었다. 이러한 짝짜꿍 동요가 8․5 이후에는 당연히 청산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동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과 역사의 특수성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6․25를 지나 60년대에 들어와서야 동요는 동시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거의 그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때부터 씌어진 거의 모든 동시가 자연을 관조하고 농촌 풍경을 완상(玩賞)하는 작품이었다. 이 자연 경물 완상 동시란 것은 그 때까지 장난감으로 삼아 온 아동이란 존재를 살아 있는 인간으로 인식한 데서 창조된 동시가 아니었다. 장난감이 되었던 아동이 여기서는 아주 내버림을 당하고 말았으니, 동시인들은 아동이 존재하는 세계와는 다른 각도로 방향을 잡고 저희들만 홀로 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연 경물을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고 있는 동시는 두 가지 면에서 불성실한 동시인의 정신을 입증한다. 그 하나는 자연이란 것을 인간의 삶과 무연(無緣)한 것으로만 파악하는 비뚤어진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자인 아동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노령에 든 옛 선비같이 사물을 정관(靜觀)하는 자세다. 그것은 결코 생명이 약동하는 아동의 마음에 통할 수 없는 어른만의 취미요, 글장난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 실은 동요가 동시로 발전했다는 단계도 문제 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참된 발전이라 보기 어렵다 하겠다.
     아동 완상이 자연 완상으로 바뀐 것이 동요가 동시로 변한 겉모습이었는데, 이러한 언제나 한결같은 어른들의 전유물인 동시가 70년대에 들어오자 아동을 더욱 멀리하는 일부 동시인들만의 기호물로 되어 갔다. 감각적 언어 기교의 동가 범람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이런 감각적 기교 동시는 다시 또 한 걸음 나아가 그 감각마저 실감에서 떠난 빈 말장난이 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난해 동시’요, 어른을 위한 ‘현대 동시’란 것이다. 아동을 기피하며 어른만의 취미를 일삼기에 아동을 팔아 오던 동시가 이에 이르러서는 막다른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니 할 수 없다. 식민지 백성으로 짝짜꿍 놀이에 빠져 있던 동요가 민족적 주체 의식을 확립하지 못하고 남의 것 흉내로 열등감을 부당하게 해소하려 한 민족적 패배의 문학이었다면, 자연 경물을 그리다가 감각적 기교에 빠지고, 다시 그것이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된 소위 ‘시’가 되었다는 동시란 것은, 청산되지 못한 민족적 열등감에다가 또 하나 더 겹친 성인 문학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성인시(그것도 외국의 어떤 것을 모방한 성인시)의 겉모습을 흉내냄으로써 이뤄진 열등의식의 문학기요, 2중으로 패배한 문학이라 할 것이다. 이러고 보면 우리의 동시는 아직도 식민지 문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해서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 표에서 아동을 주체로 한 동시의 존재를 표시한 것은, 이러한 우리 동시의 표면상의 그릇된 조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민족 동시의 명맥을 이어 온 극소수의 시인과 작품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시가 ‘시’로 되었다는 것은 시 비슷하게 된 것이요, 시 비슷하게 된 것은 시도 동시도 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동시는 동시가 됨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지 동시가 성인시로 되어야 시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동요․동시가 변모한 이 과정은 아동문학을 민족과 아동의 처지에서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열등의식에 빠져 있는 동요 시인들이 외국적인 것과 성인시를 모방함으로써 일반 시인과 자기들을 동일시하고, 한편 아동과 세계를 망각하려는 자기 마취 상태에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외국문학      8․15    성인시    1960          1970
      ↓                        ↓
       
                                                                          난해동시
    ㉮          동요                      풍경묘사동시                    감각적
                                                                          기교동시




      민족적 비애를 노래한 동시                                                                      ➜
                                                    ㉯ 동요 동시

    ㉮ 동신천사주의 동요, 동시
    ㉯ 아동을 주체로 한 동시
    4. 산문에 나타난 열등의식
     산문에서는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부터 말해 본다. 어른들이 읽는 소설도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우리말을 골라 쓰는 것이 옳은데, 동화나 소년 소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아동문학 작가들은 아동들이 알 수 있는 바르고 쉬운 우리말을 찾아 쓸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어려운 한자어를 함부로 쓰고, 안 써도 좋을 외래어를 남용하는 작가가 많다. 이것은 작품 자체의 공허(空虛)를 어른스럽고 혹은 신기한 용어로 메우려는, 일종의 열등의식의 나타남이다.
     문장에 있어서 감각적인 표현의 기어(寄語)를 애써 사용하는 일과 공연한 언어 기교의 악습에 젖은 ‘장식 문체’(裝飾 文體)도, 일반 문학 작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아동문학 작품 특유의 비뚤어진 경향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열등의식으로밖에는 풀이될 수 없는 현상이다.

     저마다의 빛깔로 충만하게 들어서 있는 가들이 부담 없이 안겨 주는 기쁨에 젖어 있는 자신을 아이는 모른다.

     이것은 어느 문학지에 발표된 동화의 문장을 하나 예로 든 것이다. 이러한 공허한 장식 문체는 어느 특정한 한두 작가에 한하지 않고 작가라는 이름이 붙은, 너무나 많은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 있어, 이러한 예문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이런 문장을 읽게 되는 어린이야말로 불행하며 차라리 안 읽는 것이 다행이다. 아동들이 문학 작품을 싫어하도록 만들고 문학을 모르는 자신을 열등시하도록 할 것이 너무나 확실하다.
     다음은 무국적성(無國籍性)과 당치도 않은 어른 취미에 대해서다. 생활동화는 공상동화든 민족과 아동의 현실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국적의 표현이 아니면 생활 그 자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성인 취미란 것은 가령 어른들의 연애 감정이나 애정 생활 같은 것을 동화라고 쓰는 일이다. 이런 무국적 무생활의 동화와 성인 취향의 작품은 화려한 물질적 생활을 턱없이 동경하게 하고 혹은 현실을 눈감게 하여 불건전한 생활 태도와 정신을 기르게 된다. 그것은 마치 시골 아이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들여다보고 열등의식을 길러 가는 것같이 어린이들의 열등감을 길러 주는 노릇을 한다. 그것은 외래적이고 모방적인 것이며, 반민족의 문학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이른바 평론들에 나타나고 있는 작가들의 비뚤어진 의식 표현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아동문학 작가들의 열등의식과 그 불건전한 해소 방식을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는 궤변적 언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작가들의 아동 기피 혹은 아동 유리(遊離)의 창작 태도를 시와 문학의 이름으로 변호하고 있는 일이다. 우리 아동문학이 어른들의 기호에 맞추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언급하였다. 동시에서는 무의미한 난해적 표현, 제재의 성인 취향, 시인의 사치한 몽상 취미 등, 동화에서는 요란스런 장식 문체, 서구적인 것의 모방을 일삼는 무국적성, 도시의 특수한 귀족적 아동의 모습을 ‘이상과 낭만의 문학’이란 이름으로 그려 내고 있는 상업성 등, 이런 모든 주체성을 잃은 창작 태도를 노골적으로 대변하고 옹호하기 위해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①아동문학의 일차 독자는 아동이지만 역시 어른이 쓰는 것이고 어른이 읽을 만해야 문학이 된다. 아동을 너무 의식하면 문학이 안 되고 예술성을 확보할 수 없고 작품이 저급해져서 아이들 작문같이 된다.
     ②아동이라고 하지만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아동은 극소수다. 아동문학은 이 극소수의 선발된 아동이 예술을 감지하는 능력에 의해 읽혀지고 감상되는 것이면 된다.
     ③어떤 학자의 학설에 따르면 아동이란 1세에서 20세까지다. 아동을 20세까지라고 보면 동시의 난해성 문제도 해결되고, 아동문학의 질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도 명확해진다.
    ④아동문학이라 할 것이 아니고 그냥 문학이라 함이 옳고, 동시라 하지 말고 그냥 시라 해야 한다. 아동이란 말을 시 앞에 붙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아동 독자를 전혀 예상하지 않는 어른을 위한 동시도 있을 수 있다.
     이 네 가지 주장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여기서 간단히 비판해 본다. 아동을 너무 의식하면 문학이 안 된다는 ①의 주장은 아동문학 작가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일반 작가들이 아동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쓴 시나 소설이 결과적으로 아동에게도 읽히어 아동을 위한 문학이 되고 있는 예는 가끔 있는 사실이지만, 벌써 아동문학을 전업으로 하는 작가가 아동을 생각하지 않고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설사 그가 어떤 순간에 아동이랑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고 한 편의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그런 일이 흔히 있겠지만) 그가 동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항상 느끼고 생각하는 세계가 아동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 되고 있으니, 이런 사람에게는 일부러 아동을 의식하게 한다는 것이 오히려 우습고 불필요하다. 동심에서 살고 있는 작가에게는 아동을 의식하고 어쩌고 무슨 필요가 있는가. 아동을 의식한다 안 한다가 문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아동에게 읽히는 문학이 되고 있는가 아닌가가 문제다. 아동에게 읽히는 문학이 되기 위해 아동의 생활과 심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어찌 무익하며, 아동문학가로서의 그러한 노력이 어찌 불필요하겠는가. 아동문학 작가가 아동의 현실과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아동문학을 아동의 것으로, 깊이 있는 감동의 문학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동 작가가 아동의 세계를 알 필요가 없고 아동을 너무 생각하면 문학의 질이 떨어진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해서 이뤄진 것일까. 이것은 아동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덮어놓고 그들을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멸시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아동 세계의 진실함과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동을 다만 미숙하고 불완전하고 아름다울 수도 없는 것으로 보고, 그리하여 아동의 심리나 생활이 문학의 세계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동을 믿지 못하고 멸시하고 기피하는 태도는 이렇게 하여 형성된다. 이런 사람이 아동과 아동문학을 열등시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동의 세계를 알 필요도 없고 아동을 의식하면 문학이 제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다만 이런 사람이 아동문학을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해한 한국적 현상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아동문학이 유아들을 완상하는 어른 중심의 문학이 되었던 것은 아동을 너무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동을 전혀 의식하지 않거나 잘못 의식한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이 아니라 인식을 못한 때문이다. 어른이 읽을 만해야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아동을 모르고 아동을 불신하는 말이다. 어른에겐 재미있는데 아이들에겐 재미없거나, 아이들에겐 감동 깊게 읽히는 것이 어른에겐 시시하게 보여지는 그런 아동문학 작품이 있을 수 없다. 독자의 나이와 취향에 따라 또 작품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아이들이 즐겨 읽는 것은 어른들도 즐겨 읽게 되고 아이들이 시시하게 보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시시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받아들이는 감정은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그 순수성을 확보해 가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다음 ②, 아동문학의 독자로서의 아동은 극소수의 선발된 아동이라는 주장인데, 이것 역시 허망한 말이다. 일반 성인 문학의 독자도 극소수의 선민(選民)이라면 괴이한 말이 되겠는데 아동문학의 독자를 이렇게 한정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말이다. 독서 취미를 가진 아동이 극소수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다만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주장은, 아동을 무시한 난해 동시나 어른 본위의 백일몽 같은 동화를 어떻게 해서라도 아동문학의 이름을 빌어 문학 작품으로 행세할 수 있도록 해 보려는 데에 그 의도가 있는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아동 독자가 극소수의 선발생(選拔生)이란 이론의 허망성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내세우는 것이 ③의 아동 20세 상한설(上限設)이다. 벌써 여기에 이르면 비판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논리고 뭐고 할 것 없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의지해 보려는 몸부림같이 느껴진다. 20세 가까운 아동을 주된 독자로 하는 문학 작품을 쓰는 것도 좋다. 문제는 아동에게 이해되지 않고 아동이 친근할 수 없는 작품을 이렇게까지 억지를 세워 가며 굳이 아동문학의 범주에 넣으려고 애쓰는 태도다. 일반 문학에도 낄 수 없는 작품이고 보면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는지 모르지만 결국 재난은 아동문학에 내리는 것이고 아동들만 수난 당한다. 아동을 버리고 어른들 쪽으로 달려가 있으면서도 아동의 이름을 팔고 있는 이들이 드디어 아동이란 이름마저 문학에서 없애 버리자고 하는 ④와 같은 자기 부정의 모순된 발언, 혹은 솔직한 발언을 하게 된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다음 두 번째로 병든 문학 태도를 옹호하는 비뚤어진 언론으로 지적해야 할 것이 서민 정신에 대한 비방이다. 아동을 멸시하고 멀리하는 이들은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과 아동의 생활을 진실하게 파악하려는 문학 태도를 반대하고 또한 아동문학이 서민 정신에 서서 창조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중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념과 철학을 가질 수 없는 열등감 소유자의 병든 해소(解消) 행위가 되고 있다. 아동문학이 아동을 위한 문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아동의 건전한 성장과 그들의 미래가 밝고 빛나는 세계가 되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철학을 기반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회적 현실을 양심으로 파악하고 아동의 생활을 정직한 눈으로 보고 거기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상이나 공상은 여기서 비로소 그 의미를 부여받을 것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도 여기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해방 30년 동안 다만 어른의 장난감이 되고 혹은 어른의 문학 취미를 만족시켜 주는 도구나 방편이 되어 버림받아 온 아동을 다시 아동문학의 주체로 받들기 위한, 너무나 당연하고 또 긴급한 우리 민족문학의 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동을 문학의 도구로 이용하는 이들은 아동의 생활과 감정에 뿌리박은 문학을, 현실을 그대로 복사하는 사진사의 그것이라고 왜곡시켜 말한다. 그리고 아동과 생활을 문학으로 표현하는 것은 작가의 문학적 상상을 거부하는 행위라고 말하는데, 이들의 ‘문학적 상상’이란 것이 바로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현실도피의 백일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동과 생활을 기피하는 이들이 서민성을 반갑게 여길 리 없다. 이들은 서민이란 말을 싫어하여 이 말이 불온성을 띤 것처럼 비방하다가, 드디어 프로 문학과 억지로 연결시켜 놓고는 난폭한 인신공격까지 하고 있다.
     여기서 아동문학 평론의 문장에 대해 언급할 차례가 된 것 같다. 평론 문장에 나타난 열등의식의 표현으로는 ①현학 취미를 자랑하는 난삽한 번역체, 허식적 문체 ②저급한 감정을 배설하는 감정문 ③높은 자세로 남을 호령하는 허세적 문체, 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①의 예
     시술(施術)은 하나의 기술임에 틀림없지만 단순한 기술이 아니고 일차 그의 인식적 방법은 시적 상상력에 독특한 준비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②의 예
     이 무슨 철 늦은 잠꼬대란 말인가. 누가 평론이랍시고 ‘시(詩)란 무엇인가?’하고 제 나름의 ‘발견적 시론’(發見的 詩論)도 아닌 남의 이론(理論)들을 차용해서 구색(具色)만 갖춘, 그나마도 정제(整齊)된 체계(體系)도 없이, 글을 내놓았다면 실소(失笑)를 사기 십상일 것이다. 헌데 그는 치기만만(稚氣滿滿)한 문학청년의 기질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사뭇 기고만장(氣高萬丈)이다.
     ③의 예
     다시는 여상(如上)한 불행한 활자를 줍게 하지 않기 위하여 문제된 제군(諸君)들의 ‘실력 행상’ ‘문학회복’(文學恢復)을 74년에 바라 마지않는다.
     이러한 허세와 장식문은 항상 그 내용의 공백과 이론의 허망성을 그 스스로 입증해 주는 표현이 된다.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얕고 믿음이 없을수록 남의 권위에 기대는 수밖에 없어 외국의 유명 문사들을 빈번히 인용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어려운 낱말을 쓰고, 문장은 이해가 잘 안 되도록 야단스럽게 꾸미고 비비 꼬아 놓는다. 또 평론을 시를 쓰듯이 감정을 쏟아 놓기도 하고, 유아독존의 치졸한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글의 제목까지 ‘턴다, 19xx년의 시’ ‘네가티브적 시론을 추방한다’ ‘비리, 부정, 섬어 기타’등, 언뜻 보아도 자기 세계의 현시(顯示)가 없는, 남을 헐뜯기 위한 글같이 보인다. 이런 모든 문장의 허식성과 경박성은 아동을 버리고 성인 문학의 흉내를 내려 하고 그런 흉내를 내는 경향을 변호하는, 그릇된 이치를 세우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아동을 기피하는 작가들이 아동문학의 독자를 극소수의 아동으로 한정하고 싶어하고 혹은 어른에 가까운 아동이 있다고 하다가 마침내 아동문학은 아동을 상대로 하지 않아도 되고, 아동이란 말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다. 근자에 아동문학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그 제약성 때문에 하나의 문학적인 사상을 이루지 못하고, 소박한 휴머니즘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섭섭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견해가 아동문학을 열등시하는 일반적 풍조와 아동문학을 부정까지 하게 되는 일부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런 발언은 진의야 어디에 있든 결과적으로 아동문학 작가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는 말이 되고 있음은 확실하다. 문학 사상이란 대체 어떤 것이어야 버젓한 것이 될 수 있는가? 어린이들의 세계를 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성실히 창조해 가는 것보다 더 긴요하고 훌륭한 사상이 무엇일까?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은 문학 사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창조하여 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우리 민족의 작가라면 안데르센보다 더 귀중한 우리들의 자랑이라 할 것이다. 또 휴머니즘이란 것을 너무 신묘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소박한 것이야말로 거짓이 없고 순수하고 내용이 충실한 것의 모습이며, 인간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다. 아동문학의 가치를 의심하는 태도는 아동문학을 열등시하고 혹은 부정하는 태도와 함께 아동문학에 대한 작가들의 신념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앞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아동문학 작가들이 민족적 열등의식을 물리치지 못한데다가 모든 가치가 돈으로 계산되는 상품 시대가 되어 박대를 받는 아동문학을 스스로 멸시하고 성인 문학을 부러워하는 또 하나의 열등의식이 겹쳐져서 아동과 아동문학을 불신하는 풍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열등감을 씻어 주지 못하던 동신천사주의는 아동문학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또 하나의 열등감으로 말미암아 아동에게 더 한층 열등의식을 고취하고, 그리하여 드디어 아동문학 자체마저 부정하는 위기에 이른 것이다.
    5. 해결의 전망과 그 문제점
     지금까지 우리 아동문학의 과거와 현재를 열등의식의 표현 혹은 그 왜곡된 해소 방식으로서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논하였다. 여기서는 민족적인 혹은 인간적인 주체성을 확립함으로써 열등의식을 훌륭히 극복한 작자와 작품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우리 아동문학의 초창기부터 활동한 마해송․이주홍․이원수, 이들은 민족문학으로서의 우리 아동문학을 지탱해 온 커다란 기둥이다. 이들은 항상 민족과 아동의 삶을 문제로 하여 진실을 창조하여 왔지만, 그때그때 문단적 시장에서는 그 문학적 비중이 차지하는 만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차라리 상품 시장에서는 천박한 내용의 유행물이 보다 많이 보급되었다. 이것은 사회 환경이 진실보다 가식적이고 부박(浮薄)한 것이 환영받는 상황이 된 까닭이고, 한편 이들은 참된 문학 정신의 소유자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소위 입신출세식의 처세를 외면하며 살아온 때문이라고도 여겨진다.
     마해송(1905~1966)씨는 창작 동화의 길을 개척한 사람이다. 그는 일제와 외세에 대해 민족주의라는 것을 자신의 정신적 기둥으로 삼고 매우 완강한 저항을 함으로써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동화 〈토끼와 원숭이〉(《어린이》1931.8~1933.1 연재)는 일제에 대한 반항 의식을 표현한 것이고, 〈떡배 단배〉(1948년 ‘자유 신문’ 신년호부터 시작하여 20일 동안 연재)는 8․15 이후 우리나라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항거 의식의 나타남이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러한 약소민족으로서의 대외적 반항 의식이 국내 사회의 온갖 불합리와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 나타나 〈모래알 고금〉(1958) 〈꽃씨와 눈사람〉(1960)《앙그리께》(1954)등의 작품을 쓰게 되었다. 이 작가의 한국적인 전통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농촌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든가, 봉건적 인습과 사회 제도로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어린이에 대한 사랑 같은 것도 그의 민족적인 정신을 기반으로 한 휴머니즘의 나타남이라 할 것이다.
     마해송 씨의 동화는 철저하게 사회와 현실의 문제에서 발상된다. 그의 동화에서 동물이나 식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와도 그것은 결국 인간의 문제를 얘기하려고 한 것이다. 주제가 명확하고 줄거리가 단순하고 선명한 설명문으로 되어 있는데, 소설적 묘사가 부족하고 관념적 주제가 너무 드러난다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현대적 동화를 별로 대할 수 없었던 우리 아동들에게 이런 동화는 매우 필요하였고 귀한 읽을거리였단 것이다. 우리의 근대 동요가 첫걸음을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동심천사주의의 모습을 띠게 된 것과는 달리 동화에서는 이 천사주의가 지배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마해송 씨 같은 사람이 민족주의적 주체 의식을 근간으로 한 동화를 써서 열등의식을 넘어섬으로써 외래적 탐미주의나 동심주의에 강력한 제동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마해송 씨는 창작 동화를 개척하여 전래 동화에서 현대적 동화로 발전하는 교량 역할을 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훌륭히 감당하였던 작가다.
     이주홍(1906~1987) 씨의 작품에 나오는 아동은 농촌과 도시의 가난한 서민의 아이들로 되어 있는데, 이런 아이들은 다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하나는 불행한 환경 속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자라는 아동상(像)이고, 다른 하나는 순진한 행동을 하면서 때로는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는 장난꾸러기들의 모습이다. 앞의 것이 역사적 현실 속에서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아동을 주체적으로 파악하여 리얼하게 그림으로써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고 있는데, 뒤의 것은 장난꾸러기 아동이나 소년들을 익살스럽게 그려 그저 재미있어 웃기는 얘기가 되도록 하면서, 사회와 인간을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다. 이주홍 씨 작품의 특징은 주제가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다만 얘기의 재미에 끌려 단숨에 읽도록 구성과 표현이 배려되어 있는 점이다. 작품에 스며 있는 서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스한 애정, 해학적인 문장과 리얼한 묘사가 보여 주는 사회와 인간의 진실한 파악 등은 그의 많은 동화와 소년 소설을 우리 아동문학의 귀한 재산으로 만들고 있다. 가령 장편 소설 《아름다운 고향》(남경문화사․1954)을 예로 들면, 시적(詩的)으로 펼쳐지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었던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민족사의 한 토막을 불행한 백성들의 수난과 항쟁의 얘기로 엮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한 소년이 식민지적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자라나고 있는가를 감동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원수(1911~1981) 씨의 작품은 불행한 민족과 불행한 아동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일제하에서는 동요와 동시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고, 해방 후에는 동화와 소년 소설을 더 많이 써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어린이 편에 서서 그들에게 진실한 삶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는 국토의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전쟁과 그 밖의 온갖 민족적인 수난의 상황을 그 어느 아동문학 작가도 못 미쳤던 깊이로 진지하게 다루었다. 민족적 삶의 현실은 곧 아동의 현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이 현실과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루어 무한히 깊은 사상을 담을 수 있음을, 이 작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열등의식을 병적으로 해소시키고 있는 아이들, 약육강식의 질서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 엉뚱한 꿈만 꾸도록 하고서 부모 형제와 함께 살고 있는 눈앞의 삶을 눈감도록 강요받아 온 아이들, 이런 모든 아이들에게 식민지적인 노예근성에서 벗어나는 힘과 지혜를 그의 작품은 안겨 줄 것이다.
     근년에 열등의식을 강렬한 작가 정신과 인간적 성실성으로 극복해 보인 두 작가, 이현주 씨와 권정생 씨를 들고 싶다. 이현주(1944~) 씨의 장편 동화 《바보 온달》(송영방 그림, 대한기독교서회. 1973)은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받으면서도 인간스런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을 모두가 바보라고 하지만, 그러나 잘나고 약빠르고 남위에 올라선 사람보다 백 배도 천 배도 더 착하고 더 강하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임을 그려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돈과 무력으로 지배하는 자가 결국은 패배하고, 바보 같은 착한 정신이 승리한다는 것을 이 동화는 감동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는 가난하고 약한 자가 다만 착하고 순하고 바르고 깨끗함으로써 열등의식과는 전혀 반대의 강인한 인간 정신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 이 작가의 작품은 모두가 사회 정의와 인간 정신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성실성에서 씌어지고 있다.
     권정생(1937~) 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들을 찾아 그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고 괴로워한다. 그리하여 그 불행한 이들이 실은 얼마나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증명하여 준다. 동화 〈무명 저고리와 엄마〉(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는 이런 가난하고 수난만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요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려 주고 있다 동화 〈강아지똥〉(1969․‘기독교 교육’ 제 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당선작)에서는 모두가 더럽다고 가까이하지 않는 강아지 똥을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도록 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난한 생명에 대한 이 작가의 눈물겨운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이밖에 근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박홍근(1919~) 씨의 〈만세〉, 손춘익(1940~2000) 씨의 〈달과 꼽추〉〈돌사자 이야기〉(1973), 박경종(1916~) 씨의 〈돌아온 껌 장수〉, 이영호(1936~) 씨의 〈보이나 아저씨〉(1973) 〈영생원 아이〉(동화집《빙판 위의 아이들》 문조사. 1973), 정휘창(1928~) 씨의 〈원숭이 꽃신〉(정휘창 동화집 《밀리터리 학교》 배영사. 1968), 윤일숙(1939~) 씨의 〈돼지〉(196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들은 외세에 대한 항거 의식으로, 불행한 혹은 착한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으로 열등의식을 극복한 작품들이 되고 있다.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문제에서 일반적으로 범하기 쉬운 오류로서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지나친 영웅화 혹은 성숙화(成熟化)다. 말하자면 난경(難境)을 벗어나기까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온갖 시련이나 인간적인 고뇌, 고투(苦鬪) 같은 것이 전혀 없거나 별로 보이지 않고 너무도 안이하게 이상(理想) 인물을 설정해서 그려 놓는 일이다. 이 점은 〈만세〉나 〈영생원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