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03-01 15:04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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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靑年社/1977 차례 책 머리에 제1부 노래를 잃은 아이들 敎師의 悲劇 교육행사의 상품화 僻地의 하늘 겉치레 교육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도망쳐가는 아이들 학부모들 그 극성 풍조 아이들 몰라주는 文學 정신교육의 不在 촌 사람, 도시 사람
제2부 나도 손목을 잡고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것 농촌과 교육과 문화 생명의 존엄 아이들이 배우는 것 人道主義에 대하여 슬기롭게 키우고 싶지만 아이들한테서 온 편지 낙엽과 청소와 교육 왜 안 읽는가 부지중에 나온 일본말 첫 교단 회상
책 머리에 제1부는 1974년 2월부터 약 1년 동안 〈女性東亞〉에 연재했던 것이고, 제2부는 10여 년 전부터 써온 수필 중에서 아이들 교육에 관계되는 것을 가려낸 것이다. 이 보잘 것 없는 글들을 책으로 꾸며 주겠다는 청년사의 후의에 또 한 번 부끄러운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기로 결심한 것은 버림받은 이 땅의 아이들을 모든 부모와 교사들이 외면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에서다. 2차대전 때 폴란드의 한 교육학자는 그가 데리고 있던 기숙사의 아이들이 나치스의 집단학살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자 「아이들을 1분간도 방치할 수 없다」면서 자기를 구조해 주려는 손길도 뿌리치고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함께 끌려가 학살당했다.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은 물론 그런 상황과는 다르다. 그러나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스스로의 영토를 잃고 쫓겨나 짓밟히고 비뚤어져 병든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사실은 나날이 우리들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폴란드의 그 학자의 백분의 일의 양심이라도 가지고서 이 글들을 썼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죄스럽다. 가려운 데를 긁지 못한 느낌이 절실하다. 지혜가 모자라 다하지 못한 말을 독자 여러분이 보충해 살펴 준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많은 질책을 기다릴 뿐이다. 1977년 5월 저자
슬기롭게 키우고 싶지만 우리 집에는 지금 다섯 살 짜리 사내아이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선 식사부터 말하면 반찬을 고루 먹도록 길들이고 있는 중인데, 고기나 달걀이 있으면 그것만 먹으려고 해서 탈이다. 그렇게 고기가 먹고 싶은 것은 단백질이나 지방질이 이 아이의 몸에 필요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고쳐 생각해 보지만 달걀이 있으면 두 개고 세 개고 있는 대로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좋지 못한 편식이다. 채소를 싫어하는 것은 채소와 함께 대개는 매운 양념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무를 졸이더라도 기름 정도로 맛들여 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반찬조차 어른들 중심으로 만들기 예사인 것이다. 군것질이 또 탈이다. 이런 산골 마을에도 가게가 있고 온갖 과자와 빵들―신문기사 거리가 되고 있는 유해식품들이 울긋불긋한 색깔로 진열되어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의 군침을 흘리게 한다. 빵이나 과자를 안 먹는 날이 없다. 도시의 아이들은 얼마나 심하랴 싶다. 집에서 간식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장난감이다. 장난감 없이 어른이 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서 웬만하면 다 사 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사 주다 보면 보는 대로 다 요구한다. 어쩌다 도시에 나가 장난감 가게 앞을 지나게 되면 제일 크고 비싼 것을 잡고 놓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돈도 돈이지만 아이의 버릇이 더 문제된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만은 안 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깨닫게 해야 한다. 장난감이라면 쌓기나무를 주고 싶은데, 그런 것이 가게에 없다. 플라스틱 제품으로 네모난 토막들을 끼워 맞추도록 한 것이 있지만 퍽 불편하다. 여러 가지 모양을 자유스럽게 만들면서 놀 수 있는 토막나무 같은 것이 있으면 지능의 계발에도 도움이 되고 참 좋겠는데, 그런 상품을 보지 못했다. 내 손으로 만들 틈이 없다. 아니, 성의가 없는 것이다. 입학 전에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이름을 억지로 쓰게 하고 있는 것은 정말 억지다. 그리고 열까지 세기를 자꾸 잊어 먹고는 야단을 맞고 있다. 그림은 곧잘 좋아해서 세 살 때부터 그렸다. 그런데 요즘은 별로 안 그리더니 며칠 전에는 무엇을 자랑스레 보이기에 오랜만에 버스를 또 그렸는가 했더니 1학년 책의 토끼를 그 위에다 종이를 대고 베껴 낸 것이다. 이런 것 나쁜 그림이다. 책의 것 베끼지 말고 마음대로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야 한다고 했더니 〈대수〉도 이렇게 그리더라 한다. 대수는 이웃에 있는 1학년 아이다. 이러다가 이놈도 책방에 뻔뻔스럽게 나오고 있는 그 〈색칠공부〉라는 것에 색칠을 하면서 좋아할 것 아닌가. 그리고 도시 아이들이 잘 그리는 만화책에 나오는 예쁘장한 여자아이의 얼굴을 교묘하게 흉내내어 그리고는 기뻐할 것 아닌가. 우울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벌써 이 아이는 골목에 돌아다니며 온갖 마을 사람의 소식을 알려 오고, 그리고 온갖 욕설을 배워 오고, 거짓말도 잘 한다. 아이들을 슬기롭게 기르고 싶다. 남을 괴롭히지 않고 제 할 일을 정직하게 하면서 창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민주시민으로 키우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된다. 이웃아이들과 어른들과, 사회의 온갖 사상(事象)과 입신출세식 교육 풍조가 이 아이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1972년 3월 女性東亞) (p.181~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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