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01-18 16:46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 이오덕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도서출판 길/2004
|
|
글쓴이 :
이주영
조회 : 28,774
|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 이오덕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도서출판 길/2004
차례 머리말 신화와 기적, 그리고 혁명 함성이 터져나온 곳 억누르는 틀 교육이란 무엇인가 학교의 등급 교사의 말과 학생의 말 한문 글자와 한자말
생명을 해방하는 표현교육 아이들을 짓밟는 어른들 억누르는 표현과 억눌리는 표현 한 아이의 경우
어떻게 보아야 하나 국민의 숨통을 막는 것 드디어 터져나온 소리 붉은 옷 붉은빛 히딩크가 한 일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시민운동의 몫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길 폭력으로 유지되는 학교의 질서 한문 글자와 우리 역사 우리 문화의 뿌리와 줄기
위대한 무식꾼들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머리말 이 책은 지난 6월에 터져나왔던 온 국민의 축구 응원 열기에 대한 생각을 쓴 것이다. 온 세계를 놀라게 한 그 고함소리가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터져나올 수 있었는가? 그 까닭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그 고함소리의 뜨거운 기운, 우리 자신의 참모습, 우리가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을 다시 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까닭을 우리 겨레가 걸어온 어찌할 수 없는 기막힌 역사에서 찾아내었다. 처음에는 이 글을 그저 원고지로 이삼백 장 정도 쓸 생각이었는데, 쓰다 보니 책 한 권 분량이 되어버렸다. 다 쓰고 난 오늘은 8월 15일, 해방의 날이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한 해 가운데 가장 뜻깉은 날,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날이다. 저녁이 되어 이제 잠시라도 오늘을 생각해보아야지, 하고는 같은 시골에 사는 동갑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ㅈ형! 오늘이 내 생일이야.” “뭐, 오늘이 생일이라고?” “그래, 죽다가 살아났으니 생일이지.: “그래 맞다. 나도 생일이다.”
이래서 그 형에게 그 생일 이야기 좀 해보라고 했더니 이랬다.
“그때 징병 소집 영장을 받았는데 8월 16일이 입대하는 날이야. 그래 14일에 친구들이 찾아와 이별주를 마셨어. 그때 군대에 끌려가면 백이면 백 모두 뼈도 못 찾고 죽어야 했으니 그 술자리가 어떠했겠나.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만 세상이 뒤집어졌네. 예비 검속에서 풀려난 사람이 돌아와 일본이 패망했다고 했어.” “나는 그때 영장은 받지 않았지만 곧 나오게 돼 있어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던 판이었어. 오늘이 광복 57주년이라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벌써 일흔일곱 살 됐구나. 그런데 광복절이라 하지만, 광복이라는 말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머리로 만들어낸 말이고, 우리로서는 역시 해방날이야.”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그럼 광복은 무슨 광복인가?” “우리 힘으로 해방한 것 아니잖아. 그러니 해방이 아니야.” “우리 힘으로 된 건 아니지. 하지만 죽다가 살아났고,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났으니 해방이지. 다시 외국 군대가 들어오고 분단이 됐지만 우선 해방이 된 것은 사실이야. 해방이라는 말은 백성들 입에서 저절로 터져나온 말이고.”
이래서 또 내 생각을 떠벌렸던 것이다.
“우리가 참 기막힌 세월을 살았제. 일제 식민지에서 20년을 살았으니 사람 한평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유소년․청년 시절을 암흑의 굴 속에서 보낸 셈이고, 다시 분단 57년을 전쟁과 독재자의 구둣발에 밟혀 살았으니 정말 기가 막혀. 난 지금 이 시대를 또 다른 식민지시대라고 보는데(“맞다, 맞아” 하고 ㅈ형의 맞장구), 이 식민지 종살이에서 우리가 벗어나 진짜 해방의 날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고 그날을 위해 살아야제. 그런데 이제 우린 늙어서 아무것도 앞장서서 할 수 없고 그저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놓고 몸이나 건강하도록 해야지.” “정말 요새 아이들 보니 희망이 있데. 이제 됐구나 싶어.”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하니, 지난 6월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터져나온 온 국민의 고함소리가 바로 ‘해방’의 소리였구나 싶었다. 그렇다. 3․1운동 때의 만세 소리며 15년 전에 독재 타도를 외친 소리가 다 온 국민의 소리였지만, 해방의 기쁨에서 터져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이 점에서 지난 6월 축구 경기에서 나온 국민의 함성은 57년 전 온 국민의 가슴에서 터져나온 소리와 가장 비슷하였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해방의 소리를 다시 찾아 가지기 위해, 그 기쁜 소리를 나날의 삶에서 살려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겠다. 이 책은 이런 생각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지만, 워낙 글재주가 없어서 좀더 시원스럽게 쓰지 못해 읽는 분들에게 미안하다. 다만 내 생각의 알맹이라 할까, 줄거리라 할 것을 대강이라도 잡아주신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다. 한 가지 미리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이 책이 ‘붉은 악마’가 주제로 되어 있고, 그 붉은 악마인 청소년을 살리는 길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몇 가지 교육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 교육 이야기는 그저 막연하게 해서는 될 수가 없다. 더구나 교육현장의 실상이라든가 표현교육의 중요성과 그 실태라든가 우리말을 살리는 문제 같은 것은,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참교육이 되는가, 아이들을 죽이는 무서운 교육이 되는가 하는 커다란 문제가 되기에 어쩔 수 없이 좀 뚜렷하게 그 실상을 붙잡을 수 있도록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씩 독립된 교육 이야기처럼 되었는데,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를 하나씩 생각해가면서 읽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하신다면 슬기로운 독자들은 아마도 내가 이 책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02년 8월 15일 이오덕
위대한 무식꾼들 지금까지, 한문 공부한 사람들이 우리 말을 우리 글로 쓰려고는 하지 않고 한문만을 읽고 쓰고, 그 한문으로 출세를 해서 권세를 잡고, 재물을 모으고, 정치를 해서 사람들의 삶을 잘못된 길로 몰아갔다고 했다. 그렇게 몰아간 길은 한문을 숭상하는 길이고, 어려운 남의 글이나 말을 높이 받드는 길이고, 우리 것, 우리 자신을 스스로 낮춰 보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는 길이었다. 한문 공부를 할 사람의 수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권력이 그 손에 쥐여 있으니 정치과 모든 제도가 그들의 마음대로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배세력이 만들어 덮어씌우는 한문 문화가 차츰차츰 우리 문화를 조이고 파먹어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그 옛날 한문학자들이 글을 쓰면서 풀 이름, 나무 이름, 제 입에 들어가는 곡식 이름 하나 우리 것으로 적어두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런 버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백성들의 피를 더럽혀놓았는지, 사실은 지금도 교육으로 아이들을 그렇게 병들게 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 꼴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우리 글로 쓴다고 하는데도 그렇다. 우선 시장에 가보라. 비닐봉지나 포대에 넣어둔 쌀을 쌀이라 적어놓은 경우는 드물고 죄다 ‘백미’다. 콩은 ‘대두’라고 되어 있다. 검정콩은 ‘흑두’, 검은깨는 ‘흑임자’다. 밀가루는 ‘소맥분’이다. ‘대두’ ‘흑임자’ 이런 말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어째서 쉬운 말로 적지 않고 장사한다는 사람들이 이러는가? 그러나 장사꾼들이 사람들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외국 것, 어려운 말로 적힌 것, 모르는 말로 적힌 물건을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 것보다 남의 것이 더 낫다는 것은,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남의 것이 좋아 보인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되었다. 더구나 물건 이름이나 내용을 설명한 말이 어렵거나 알 수 없는 말로 써놓은 것을 더 믿다니,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우리 국민들, 우리 어른들이 히딩크를 배우자고 하기 전에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할 것이다. 붉은 악마를 따르자고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얼빠진 마음부터 다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쌀이나 콩이나 고추 따위를 지어내는 농사꾼들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더구나 옛날처럼 호미로 김을 매던 농사꾼들은 거의 모두 사라지고 기계와 농약으로 농사를 짓게 되고부터 우리 말은 농촌에서 아주 형편없이 짓밟혀 호미와 괭이와 지게와 함께 사라졌다. 호미와 지게와 소 대신에 경운기와 손수레로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제정신만 가졌다면 우리 말은 얼마든지 살릴 수가 있는데, 정신이 다 빠진 것이다. 정신이 빠진 것은 그렇게 되도록 정치가 사회의 틀을 짠 것이고, 말이 아닌 글로 살아가는 글쟁이들이 우리 말을 살리고 우리 마음을 살리는 일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농사꾼이라는 말도 거의 안 쓴다. 웬만하면 농장주다. 논밭이라 하지 않고 농장이라 하니 농장주가 되었다. 곡식은 ‘작물’이 되고 나물은 ‘야채’다. 신문에서 죄다 그렇게 쓰니 일본말이 그만 우리 농사말이 되었다. 김맨다거나 풀 뽑는다는 말은 간 곳 없고 제초한다고 하고, 풀 깎는 기계를 ‘풀깎개’라 하지 않고 ‘예취기’라 하는 일본말을 쓰는 것을 보면 이 기계가 일본에서 왔구나 싶지만, 일본에서 들여왔더라도 일본 한문글자말을 되지도 않는 한문 글자 소리로 읽는 ‘예취기’가 뭔가? 모를 심는 기계도 ‘모심개’라 하면 얼마나 좋은가. 이걸 또 ‘이앙기’라 하니 참 어이가 없다. 소만 치는 것도 농사라 하고 꽃만 가꾸는 것도 농사라고 해서 이것도 ‘(젖소)농사’ ‘꽃농사’ 하면 될 터인데, 요새는 ‘낙농업’ ‘화훼농업’ 한다. 꽃을 꽃이라 하면 값이 안 나가고 ‘화후;’라 해야 더 값이 나가는 모양이지. 농약은 뿌리는 게 아니고 살포하는 것이고, 물도 뿌린다고 하지 않고 ‘살수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한자말을 관청에서 앞장서서 쓰고 퍼뜨린다. 또 농민 신문이고 일반 신문이고 신문기사에서 쓰는 말이 죄다 이런 꼴이 되어 있다. 신문에 보면 흔히 사진을 설명하는 글이 ‘김맨다’든가 ‘풀 뽑는다’고 해야 할 말을 이렇게 쓰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제초작업을 실시한다’는 꼴이다. ‘보리를 벴다’고 하지 않고 ‘보리 수확작업을 했다’고 하고, ‘불을 끈다’는 언제나 ‘진화작업을 전개한다’로 되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쟁이들은 이렇게 해서 우리 말을 죽이고 우리 백성들의 정신을 죽이고 있다. ‘신토불이’라는 말도 농민들이 먼저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어느 학자가 일본 책을 보고 유식함을 자랑하려고 썼을 것인데, 이것이 또 유행이 되어 장사꾼이고 농사꾼이고 다투어 쓰고 있다. ‘몸과 땅은 하나’라는 말이겠는데, 굳이 이런 뜻을 알리고 싶다면 우리 말로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쉬운 우리 말로써는 권위가 서지 않거든. 남들이 쳐다보지 않거든. 그래서 ‘신토불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 그것도 한문 글자로 쓰게 된다. 농산물 포장지마다 알 수 없는 말, 한자말을 자랑스럽게 써붙이는, 정말로 무지몽매한 이 나라 유식쟁이 백성들이 딱해서 볼 수가 없다. 이 몸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면 이 땅의 말과 이 땅의 글자를 써야 하는데, 어째서 신토불이고 身土不二인가? 왜 우리가 이 모양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한문․한자말이 되니 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은 우리 말의세계를 모르고 우리 말의 참맛을 느끼지 못한다. 한글로 소설을 쓰고 시를 써도 그렇게 된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글의 질서는 우리 말의 질서와 아주 다른 것이 되어버렸고, 낱말을 가려 쓰는 것도 딴판이 되었다. 앞에서, 우리 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어느 시인도 한문시를 번역하면서 ‘소소히’ ‘의의하다’ 따위 괴상한 한자말을 그대로 썼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요즘 우리 문인들이 즐겨 쓰는 ‘우아하다’는 말을 보기로 들어보겠다. 먼저 이 ‘우아’라는 말은 홀소리만으로 되어 있어서 귀로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말이 될 수 없다. 또 글자로 써놓아도 그 뜻을 알 수 없다. 결국 한문 글자로 ‘優雅’라고 쓰고 이 글자를 아는 사람만이 말뜻을 알 수 있는데, 한문 글자로 써야 알게 되는 말을 어떻게 우리 말이라 하겠는가? 그런데도 왜 이 말을 문인들이 자꾸 쓰는가? 그 까닭은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일본글에 이 말이 잘 나와서 그것을 자주 보고 읽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일반 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더 쓰고 싶어하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이 말을 한문 글자로 쓰고 읽는 소리도 ‘유우가’로 나오기에 우리와는 달리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보통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을 써야 멋진 글이 되고 남들이 그 글을 쓴 사람을 우러러보게 된다고 생각하는 이런 심리는 그 옛날 한문 공부로 출세해서 살아가던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날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수필을 쓰고 신문기사를 쓰는 사람들도 그대로 이어받아 거의 다름없이 공통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아하다’는 말은 사전에도 올라 있다. 글쟁이들이 많이 쓰니까 안 올릴 수 없겠지. 그 풀이를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답다’고 해놓았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을 쓴 경우를 보면 ‘아름답다’고만 써도 얼마든지 될 말을 이렇게 쓴다. ‘아름답다’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 아름답다는 말에는 고상하고 기품이 있다는 뜻도 들어 있다.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 쉬운 말이고 우리 말이기에 남들이 잘 모르는 한자말을 써야 뭔가 기품이 있고 고상해 보이겠다 싶어 이런 말을 쓴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름답다’는 말은 또 ‘깨끗하고 수수한’ 모습을 말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말에는 ‘곱다’ ‘곱살스럽다’ ‘예쁘다’ ‘예쁘장하다’ ‘예쁘디예쁘다’ ‘말쑥하고 예쁘다’ 따위로, 나타내려고 하는 대상의 형태와 빛깔과 움직임과 표정에 따라 온갖 말을 찾아 알맞게 써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다 쓸어버리고 ‘우아하다’는 괴상한 말 한 가지만을 쓰고 있으니 도대체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 말에 둔감할 수 있겠다 싶다. 한문 글자를 모르고 그 옛날부터 일만 하면서 살아온 우리 백성들이 우리 말을 얼마나 아름답고 참되게, 올바르고 재미있게, 넉넉하고 쓰기 좋게 가꾸어왔는가 하는 것을 한 가지 보기를 들어 말해보겠다. 어떤 물건의 수효나 분량이나 넓이나 깊이를 말할 때, 단위를 가리키는 말 앞에 보통으로는 한․두․세․네․다섯… 이런 수를 나타내는 매김씨(관형사)를 쓰는데, 단위를 나타내는 말의 첫소리가 어떻게 나는가에 따라 ‘네’는 ‘넉’이나 ‘너’가 된다. 가령 종이를 셀 때 한 장, 두 장 이런데 그 다음에는 ‘세 장’이 아니라 ‘석 장’이고 ‘네 장’이 아니라 ‘넉 장’이다. 또 곡식을 말로 될 때는 한 말, 두 말이고 그 다음은 ‘세 말’이 아니라 ‘서 말’이고 ‘네 말’이 아니라 ‘너 말’이다. 윷놀이 때도 ‘세 동 났다’고 하지 않고 ‘석 동 났다’고 하고, ‘네 동 났다’고 하지 않고 ‘넉 동 났다’고 한다. 그래야 바른 말이 된다.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누가 이렇게 정해놓았는가? 이것은 어떤 문법학자가 정한 것도 아니고 말이 저절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말을 저절로 그렇게 써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종이를 셀 때나 곡식을 될 때, 만약에 사람의 수를 세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두․세․네로 세어서 ‘세 장’ ‘네 장’이라 하거나 ‘세 말’ ‘네 말’이라 하면, 그만 이 세 장―네 장, 세 말―네 말이라는 말소리가 자칫하면 다른 뜻을 가진 말소리처럼 느낄 수가 있다. 우리가 지금 글자로 이렇게 써서 눈으로 보고 하니까 그런 느낌이 안 들 것 같지만, 글을 떠나 말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조금만 다른 말과 비슷해도 그것을 아주 날카롭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세’와 ‘네’에 와서는 ‘석’이나 ‘서’가 되든지, ‘서’나 ‘너’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말을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모두가 말하게 된 것이다. 사실 ‘한’과 ‘둘’은 그 첫소리며 가운뎃소리며 받침소리가 다 다르고, 다섯부터는 아예 두 소리마디로 되어 있어서 알아듣기가 아주 좋다. 그런데 ‘세’와 ‘네’는 첫소리만 다르고, 받침소리도 똑같이 없다. 그리고 이 두 소리를 다른 뜻을 가진 말소리와 같이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밖에 이런 보기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우리 겨레가 얼마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말을 만들어내면서 살아왔는가, 한문을 읽을 줄 모르고 한문 글자를 단 한 자도 모른 사람들, 이른바 무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말소리에 민감하였던가, 그래서 그토록 풍부한 말을 만들어 쓰면서도 그 많은 말들이 서로 부딪혀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 잘 어울렸던가를 생각하면 다만 놀라고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한문을 몰랐기에 그럴 수 있었다. 한문에 빠지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무식하다는 것이야말로 귀하고 또 위대하다고 할밖에 없다. 적어도 우리 역사, 우리 문화를 생각하면 그렇다. 자, 그러면 글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말에 귀가 어둡고 느낌이 둔한가를 좀더 보기로 하자. ‘발발’이라는 말을 우리 말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섯 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 세 가지는 우리 말이다. ‘종이를 발발 찢었다’고 할 때의 ‘발발’과 ‘추워서 발발 떤다’고 할 때의 ‘발발’ 그리고 ‘발발 긴다’고 할 때의 ‘발발’이다. 그래서 ‘발발’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세 가지로 달리 쓰이는 우리 말로 느낄 것이다. 이것이 우리 겨레가 만든 말이다. 글을 모르고 책을 읽지 않았던 우리 백성들이 써온 말이다. 다른 두 가지 ‘발발’은 한문 글자로 된 말이다. 흔히 글을 쓰는 사람들이 쓰는 ‘전쟁이 발발했다’고 할 때의 ‘발발’과 ‘기세가 발발하다’고 할 때 쓰는 ‘발발’이다. 이 한자말 두 가지는 한문을 쓰고 한문으로 살아가던 시대에서는 쓸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쓸 수가 없고 우리 말이 될 수가 없다. 귀로 들었을 때 조금도 그 뜻을 느낄 수 없고, 다른 우리 말을 연상하게도 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났거나 터지는 것이지 어째서 발발하는가? 그런데도 글을 쓰는 사람 가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거나 터졌다고 쓴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렇게 쓰면서 그 말이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니 어째서 그런가? 그 까닭은 일본 사람들이 모두 이 한자말을 쓰고 일본글에 자꾸 나오니까 따라서 쓰기 때문이고, 또 그런 글의 세계, 한자말로 된 글의 세계에 갇혀 있으니까 우리 말을 모르는 상태가 됐지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우리 말, 쉬운 말, 백성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말,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말을 멸시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될 수 없는 글을 써서 유식함을, 권위를 세우려도 하는 것이다. 글의 세계에 갇힌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기세가 발발하다’고 하는 말도 우리 말로는 ‘기세가 대단하다’든지 ‘기세가 돛대 같다’고 하면 그만이다. ‘만끽’이라는 괴상한 말도 신문에 자주 나온다. 흔히 사진을 설명해놓은 글에 ‘상춘객들이 봄을 만끽하고 있다’는 꼴로 쓰는데, 이런 말을 쓰는 심리도 ‘발발한다’를 쓰는 경우와 똑같다. ‘뜻’이라고 하면 듣기도 좋고 읽기도 좋은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의의’라고 쓴다. 우리 말에 대한 불감증에 걸려도 이만저만 걸린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이 얼마나 많은가. 신문에 날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에 ‘수수한다’가 있다. 대개는 ‘금품 수수’로 되어 있다. ‘금품’은 돈이나 물건인데, 기사를 읽어보면 사실은 물건이 아니고 돈이다. ‘수수’는 ‘주고받음’이다. 그런데 이것도 대개는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돈을 받았다’ ‘돈봉투를 받았다’고 해야 바른 말이다. 그런데 ‘금품 수수’가 뭔가? 수수는 밭에 심어 가꾸는 곡식이다.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우리 말이 있는데도 우리 말을 안 쓰고 한자말을, 그것도 엉뚱한 느낌을 주는 말을 쓰니, 이게 무슨 짓인가? 얼마나 머리가 둔하기에 이런 말을 예사로 쓸까? 그런데 이 경우는 머리가 둔해서 그렇다고, 어려운 말로 유식함을 자랑하기 위해 이렇게 쓴다고만 할 수는 없다. 사실을 덮어 감추거나 얼버무리거나 분칠하는 데 한자말을 아주 효과 있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요사하게 쓰이는 한자말로 신문에 자주 나오는 몇 가지만 더 들면 ‘비자금’ ‘분식회계’ ‘촌지’ 같은 것이 있다. ‘비자금’이라고 하니 뭔가 귀한 돈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비밀 자금’이고, 같은 한자말이라도 잘 알 수 있는 말로 써야 한다. ‘분식회계’도 아리송한 느낌이다. 이것은 ‘거짓 회계’라든지 ‘이중 장부’라고 해야 알 수 있다. ‘촌지’는 바로 ‘돈봉투’라고 해야 바른 말이다. 그리고 ‘유감’이라는 말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데, 이 말이 사실을 얼버무리거나 어려운 고비를 적당히 비켜가는 데 편리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이 말이 ‘졸업식 유감’ ‘놀이터 유감’ 따위 글 제목으로 쓰일 때는 섭섭하다는 뜻으로 썼는지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 쓴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잡지나 신문에는 이런 글 제목이 심심찮게 나온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귀가 먹어서 소리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눈으로 글자만 보고 머리로 글을 쓴다. 그러니까 신문에 숱하게 나오는 말들이 언제나 틀에 박힌 한자말이다. 마늘 협상 다시 하라는 소리가 ‘높아졌다’고는 결코 쓰지 않고 ‘고조’라고만 쓴다. 무슨 긴장이 ‘높아졌다’고 할 것도 모조리 ‘고조’다. 노․사 협상은 까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무산’이 된다. 큰비가 와서 물난리가 걱정되어도 ‘호우’에 ‘수해’가 ‘우려’된다는 꼴이다. 농성이나 협상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돌입’하는 것이 되고, 선거 싸움이 시작되지는 않고 반드시 일본말 따라 ‘개시’가 된다. 그러니까 보는 것은 ‘목격’이고 놀라는 것은 ‘경악’이고 드러나는 것은 ‘가시화’로 써야 글값을 인정받는다고 알고 있다. 신문에 경치가 좋은 곳을 알리는 기사가 언제나 나오는데, 우리 말 ‘골짜기’를 쓴 글을 보지 못했다 모조리 ‘계곡’이다. 이제는 중고등학생들도 어른들 따라 모두 유식한 말을 쓰게 되었다. ‘접한다’는 말은 어째서 또 그렇게 즐겨 쓸까? 누구를 ‘만난다’, ‘소식을 듣는다’. ‘책을 읽는다’, 무슨 일에 ‘부딪쳤다’… 이렇게 쓸 것을 모조리 ‘접한다’고만 쓴다. 밥은 먹고, 물은 마시고, 침이나 알약은 삼킨다. 이것이 우리 말이다. 그런데 ‘섭취한다’는 한자말로 모두 대신해버린다. 말은 하는 것이고 글은 쓰는 것인데, 이것도 ‘언어를 사용한다’고만 해버린다. 모자는 쓰고, 옷은 입고, 신은 신고, 장갑은 끼고, 목도리는 두르고, 수건은 머리에 매고, 주머니는 허리에 차고, 휘장은 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말을 죄다 싹 쓸어버리고 ‘착용한다’는 말만 쓰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말을 잡아먹는 한자말이다. 산나물도 한자말로 ‘채취한다’고만 하지만 우리 말로는 나물에 따라서 ‘꺾는다’ ‘뜯는다’ ‘캔다’ ‘딴다’ ‘벤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써야 한다. 보리는 뿌리고, 마늘이나 감자는 놓고, 콩은 심는다. 이것도 한자말로 죄다 ‘파종’이라고 잘못 쓰고 있다. 이러니까 그 어느 나라 말에도 견줄 수가 없을 만큼 수가 많아서 자세하고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온갖 그림씨(형용사)와 어찌씨(부사)를 어떻게 제대로 살려 쓰겠는가. 이제는 우리 말을 다 잡아먹는 한자말뿐 아니라 ‘~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렸다’ ‘~에의’ ‘~에로의’ ‘~으로부터의’… 따위 온갖 괴상한 외국 말법까지 마구잡이로 쓰게 되고, 아주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까지 소리 높여 하게 되는 판이 되었다. 나는, 시인들이 ‘비애’니 ‘애수’니 ‘황혼’이니 ‘여명’이니 하는 따위 말을 버리지 않는다면, 소설가들이 ‘그녀’라는 말을 버리고 우리 말법으로 우리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면, 평론가들이 ‘나는’하고 쓸 줄 모르고 ‘필자는’하고 글을 쓰기만 한다면, 신문 기자들이나 무슨무슨 운동을 한다는 지식인들이 당장 얼마든지 우리 말로 고쳐서 쓸 수 있는 일본말 ‘입장’ ‘역할’ 따위를 조금도 고쳐서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글쟁이들이 ‘앞날’이라는 말 대신에 ‘미래’라는 말밖에 쓸 줄 모른다면, 우리 겨레의 앞날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말을 죽이고 나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겠는가? 얼이 다 빠진 동물, 노예가 되고 종이 된 비참한 생물밖에 있을 것이 없다. 요즈음 시민운동단체에서 시민운동을 ‘생활언어’로 하자는 주장이 나와서 참으로 반가웠다. 7월 22일 『시민의 신문』 첫 면에는 「시민운동 성명 생활언어」라는 제목으로 된 기사가 나왔는데, 그 첫머리가 다음과 같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표하는 성명․논평․보도자료는 하루에도 수십 건에 이르지만, 그 내용들은 대중정서에 맞지 않은 생경하고 과격한 표현이나, 거대담론 언급, 구호 남발에 비문법적 문장이 많아 인식 전환 및 개선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기사는 바로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내는 신문에 실려 있는 글이다. 그렇다면 시민운동단체에서 발표하는 여러 가지 글을 ‘생활언어’로 쓰겠다고 하는 이런 기사부터 마땅히 ‘생활언어’가 되어야 할 텐데, 이 글이 그렇게 되어 있는가? ‘생활언어’라는 말부터 ‘생활언어’가 아니다. ‘생활언어’가 무엇인가? 보통 우리가 집에서 식구들끼리 하는 말, 밖에 나가서 이웃 사람과 주고받는 말이다. 그러니까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입으로 지껄이는 말이고 귀로 듣게 되는 말이니까 그냥 나날이 하는 말이고 쉬운 우리 말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입으로 하는 살아 있는 말’ 이런 말을 ‘생활언어’라고 하는 것부터 잘못되었다. 그리고 ‘이슈’는 뭐고 ‘거대담론’은 무슨 말이고, ‘비문법적 문장’은 또 무슨 말인가? 이래 가지고 어떻게 쉬운 말로 글을 쓰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위에서 인용하는 기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정도로 써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말이 될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사회의 논쟁점에 대해 발표하는 성명․논평․보도자료는 하루에도 수십 건이 되지만, 그 내용들은 대중정서에 맞지 않은 딱딱하고 과격한 표현이나 큰소리, 구호 함부로 내뱉기에다가 말도 안 되는 글이 많아, 생각을 바꾸고 고치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렇게 쉬운 말로 고쳐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이 ‘생활언어’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주로 글의 내용에 대한 것, 곧 대중정서에 맞지 않은 딱딱하고 과격한 말이나 큰소리치기, 구호 마구 쏟아놓기 같은 것을 반성해서 올바르게 하자는 것이구나 싶다. 물론 ‘말도 아 되는 말’이 많다고 했지만 이것도 본디 쓴 말 그대로 ‘비문법적 문장’이라고 하는 것, 이른바 글말에서 말하는 문법을 말하는구나 싶어 실망하게 된다. 이래서는 쉬운 말로 글을 쓰고 살아 있는 말로 운동을 해야 한다고 깨달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 쓴 그 글들의 내용이 겉돌고 딱딱한 것도 쉬운 우리 말로 쓰는 데서 비로소 바로잡을 수 있겠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다시 같은 신문에서 이 첫 면의 기사와 관련된 특집기사를 찾아보니 마지막에 「활동가들이 추천하는 “대외 홍보는 이렇게 하라”」는 제목 다음에 홍보지침 같은 것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대중의 생활언어로 성명서나 논평․보도자료를 작성하는 데서는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만 내뱉는 듯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며, 대중과 쌍방향으로 ‘의사소통’하는 마인드를 갖는 게 중요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주위 활동 동료들과 토론을 많이 가질 것, 혹시 우리 조직의 입장이 다른 시민사회단체 조직이나 일반대중의 의사와는 괴리되어 있지 않은지, 만약 다른 의견이 제기된다면 그에 대해 어떤 반론을 펼 것인지 미리 예상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들을 것.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논평이나 성명서․보도자료를 발송하기 전에 한 번 더 살펴보는 시스템을 만들 것. 언급된 날짜나 인명 직위나 통계자료에서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문법이 틀릴 수도 있으며, 아무리 날고 기는 성명서의 귀재라도 실수는 있을 수 있다.
이밖에 「새 정보통신기술 적극 활용」과 「언론홍보 더 큰 노력을」이라는 제목의 두 항목이 더 있는데, 여기서는 줄였다. 역시 내가 앞에서 판단한 대로 쉬운 우리 말로 글을 쓰고 운동을 하자는 것은 아니구나 싶다. 첫째 항목에서 ‘대중의 생활언어로’라는 제목이 나왔지만, 그 내용에 쉬운 말로 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그 글에서 쓴 말이 ‘쌍방향으로 의사소통 하는 마인드’ 따위로 도리어 어렵게 되어 있다. 그래서 셋째 항목에 나오는 말 ‘기본적인 문법’이 틀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도 논리가 맞게 써야 한다는 말로 풀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인용한 글에서도 어려운 말이나 우리 말이 될 수 없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것을 다음에 지적해보겠다. 화살표 다음에 적은 것이 우리 말이다.
● 대중의 생활언어로 → 일반이 쓰는 쉬운 말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말로 ● 작성하는 → 만드는 ● 일방적으로 → 한쪽에서 ● 쌍방향으로 의사소통하는 → 양쪽에서 생각을 주고 받는다는 ● 주위 활동 동료들과 토론을 많이 가질 것 → 둘레에서 활동하는 동료들과 토론을 많이 할 것. 함께 일하는 벗들과 토론을 많이 할 것 ● 입장 → 처지, 태도, 주장 ● 의사 → 생각, 뜻 ● 괴리되어 → 어긋나 ● 제기된다면 → 나온다면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이것은 일본 속담이다. 이런 말을 써서는 안 된다. ● 시스템 → 조직, 제도, 틀, 짜임 ● 언급된 → 말한 ● 인명 → 사람 이름 ● 뿐만 아니라 → 그뿐만 아니라 ※이 ‘뿐’ 앞에는 반드시 ‘이․그’나 ‘이것․저것’이 아니면 ‘이럴․그럴․그러할’따위 말이 있 어야 한다. 이런 말이 없이 ‘뿐만 아니라’로 시작하는 말은 일본글을 따라서 쓰는 꼴이 된다. ● 기본적인 문법 → 기본이 되는 문법, 기본 말법 ● 날고 기는 성명서의 귀재라도 → 성명서를 잘 써서 귀신같이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다는 사람이라도. 성명서를 잘 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이것은 내가 쓴다면 이렇게 쓰겠다는 생각에서 고쳐본 것이지만, 결코 나만이 가진 어떤 말버릇․글버릇으로 고쳐 쓴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 말을 살리려고 한 것이다.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떤 글을 쓰는 사람도 이렇게 써야 그 글이 우리 말이 되고 우리 글이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이 즐겨 읽게 될 것이다. 이런 쉬운 우리 글 쓰기, 우리 말 살리기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시민운동은 결코 온 국민을 움직이고 온 국민을 살리는 운동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p.287~p.303)
|
|